지난 한해 재계는 그룹 총수들의 비자금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그리고 해를 넘겨 올해에도 이 문제는 기업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특정 기업, 특정 시기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역사와 함께 어떤 기업도 비자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고 있을까. '비자금'은 과연 기업 입장에서 '필요악'인가
▲재계 비자금, 정치자금 용도 많아
비자금이라는 용어는 1987년 4월 범양상선의 불법적인 외화유출 사건에 대한 국세청의 발표에서 처음 등장했다. 무역이나 계약 등의 거래에서 관습적으로 발생하는 리베이트ㆍ커미션과 회계처리를 조작해 발생한 부정한 돈의 경우, 세금추적이 불가능하도록 특별히 관리한 자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기업은 비자금을 공식장부인 A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따로 비밀장부인 B장부를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감사에서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비자금은 기업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초창기 이런 비자금의 용도로는 주로 정치자금이 지목됐다. 실제 지난 1991년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게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관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것이 드러난 수서비리사건, 1992년 현대상선사건 등은 비자금이 정치권 등으로 흘러들어간 사례들이다.
업계에서는 현재도 비자금 조성의 목적이 '정치자금'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업 후계구도 완성 등을 위한 자금 등 다양하게 쓰인다고 설명한다.
▲'차떼기' 역사에서 그룹 총수 '수난사'로
2000년대 들어 가장 큰 파장을 불러온 것이 2002년 대선당시 소위 '차떼기 사건'이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삼성, LG, 한화, SK, 현대 대기업으로부터 불법으로 대선자금을 받았다. 이때 만원권 현금으로 사과상자에 수십상자에 실어 자동차로 운반한 일로 '차떼기 사건'으로 불렸고, 이 사건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대국민사과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 한동안 잠잠하던 비자금 문제는 MB정부 말부터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동양, 한화, SK, CJ 등 국내에서 내놓으라하는 그룹 총수들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된 것.
올 들어서도 그룹 총수들은 검찰 수사에 따른 구속과 재판에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오는 2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들에 대한 선고 공판이 한꺼번에 몰려 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대법원에서 배임 및 횡령 혐의에 대해 일부 무죄를 인정받고 서울고법에서 파기환송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에 앞서 김 회장은 지난 2012년 8월에 위장 계열사의 빚을 그룹 계열사가 대신 갚게 해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떠넘긴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는 지금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상고심을 진행 중이다. 최 회장은 지난 2008년 10월~11월까지 회삿돈 497억원을 빼돌리고, 2005년~2010년까지 그룹 임원의 성과급을 부풀려 비자금 139억원 상당을 조성한 혐의로 지난해 1월 31일 법정 구속됐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구속집행정지를 받아 병원에서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 회장은 500억원대 세금을 포탈하고 900억원대의 그룹 자산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7월에 구속 기소됐지만 신장이식 수술 등으로 구속집행정지 허가를 받고 풀려난 상태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과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은 불구속 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이달 13일 구속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은 조만간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다.
▲정치자금 vs 총수 개인 용도
이렇듯 재계 총수들이 '법의 칼날'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구조 역학상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과거 개발경제시대부터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지나치게 정치에 얽매여 있다는 설명이다. 기업 입장에서 정치권에 잘 보이기 위해 보험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비공식적인 자금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력의 움직임에 따라 기업의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상황에서 정치자금 마련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오너의 비자금이 과거처럼 정치자금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권의 주장처럼 '밤의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 간 상황'에서 지금은 비자금의 필요성이 독특한 재벌구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과거처럼 정치권이 기업을 강제할 만한 힘이 크지 않다"며 오히려 "우리나라 기업의 특성인 '재벌가'의 후계구도를 마련하기 위해 비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