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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산책] 엘 그레코의 질문



바티칸의 시스탄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유산이 되었다. 하늘이 되어버린 천장에 새겨놓은 그의 '최후의 심판'은 어떤 위대한 영혼이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누구도 다시는 뽑아버릴 수 없게 벽에 박아버린 화살이다.

미켈란젤로의 산맥을 뛰어넘기란 애초부터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여기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화가가 등장한다. 16세기 당시 베네치아 공국의 일부였던 크레타 섬 출신의 엘 그레코, 그는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활동하다 결국에는 스페인의 톨레도로 발길을 옮긴다.

미켈란젤로가 균형미를 복원하는 것에 몰두했다면 톨레도의 엘 그레코는 그와 같은 균형미를 지루하다고 여긴다. 이건 당대 최고의 두뇌로도 상상이 불가능한 이탈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엘 그레코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보다 얼굴과 몸이 길거나 현실에서는 복원이 어려운 각도로 고통스럽게 비틀려 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어두움과 빛의 대조가 매우 뚜렷하다. 이미 치밀하게 정제된 균형보다는 기존 질서를 격파하는 '발언'이 중요해진 것이다.

여기서 이해가 쉽게 가지 않았던 것은, 어둡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그림 안에서 광채가 섬광처럼 뻗어나오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엘 그레코는 그림을 그릴 때 밝은 방보다는 어두워진 방에서 사물을 응시하고 그걸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낮의 태양은 그의 '내면의 빛'을 성찰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서면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달려 있는 예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벽면 전체를 '침묵하는 휘장'처럼 덮은 벨라케스와 루벤스의 그림이다. 그건 돌연 날카로운 쇠붙이가 가슴뼈를 테러리스트처럼 막무가내로 찌르고 후벼 파듯 쑤시고 들어오는 강렬한 아픔을 그대로 닮았다. 그 그림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엘 그레코의 고뇌와 만나게 된다. 손과 발에 바위를 뚫는 두터운 징과 다를 바 없는 못이 박히고 여윈 가슴에 날선 창이 찔려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거둔 예수의 처절한 모습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비극의 압축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길에 대해 목숨을 걸고 전파했던 존재가 타살당한 현장은 우리의 심장을 격동시킨다. 엘 그레코는 그 '사람'을 정직하게 그려낸다. 아, 이건 아니잖아, 이런 생각은 여기서 시작된다. 비극의 열매는, 그래서 마침내 희망이다.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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