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 파문으로 주가하락과 불매운동 등 사면초가에 이른 남양유업 임직원들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손진영 기자
"물건 못 받는다고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알아서 해. 죽여버린다 진짜. 씨X 그럼 빨리 넘기던가. 씨X 그걸 1년 동안 알아봐요? 당신 그걸 핑계 댈 이유가 있어? 내가 해줘서 하는 거지 당신이 그걸 노력해서 하는 거야? 당신 목표가 뭔데? 당신이 한 게 뭐있어. 잔인하게 해줄게 내가. 핸드폰 꺼져 있거나 하면 알아서 해 아주. 망해 망하라구요! 당신 얼굴 보면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지난해 5월 초,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남양유업 사태의 발단을 일으켜던 전화 통화내용이다. 이 녹음 파일은 지난 2010년, 당시 34세 였던 남양유업 사원이 56세 였던 경기도 일산 한 대리점주와의 통화 녹취 내용이었다.
이후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남양유업을 넘어 만연하고 있던 대기업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마치 주종관계를 정하는 듯한 '갑을 논란'이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일으켰다. 잇따라 벌어진 '라면상무'와 '신문지 회장', CU점주와 배상면주가의 대리점주 자살 사건 등이 이와 맞물려 단지 계약서 상의 문구로만 여겨지던 '甲'과' 乙'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맹본부와 가맹점 등의 관계로까지 확대됐다.
게다가 남양유업 사태로 불거진 물품 밀어내기와 떡값 요구, 비정규직 문제,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 등 불공정 관행들에 대해 대리점이 있는 식품업체뿐 아니라 협력업체로부터 납품을 받는 백화점·대형마트·편의점 등이 횡포를 부리는 '갑'으로 지목되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경제 민주화 정책이 심화되고 '갑을 관계' 등이 사회 이슈화되자, 유통 재벌 오너들은 줄줄이 재판정에 불려나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고발돼 법정에 피고인으로 출두했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정용진 부회장은 SSM(기업형 수퍼마켓)인 이마트에브리데이가 상품만 공급해주는 소규모 수퍼마켓에 이 회사의 간판을 달게 해줬다가 "변종 업태를 만들어 골목 상인에 피해를 줬다"는 이유로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런 양상은 급기야 정치권에서 관련 위원회까지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 내에 조직된 '을지로(乙을 지키는 길) 위원회'가 지난해 10월 6일 발표한 19대 국회 국정감사 '3대 의제'에는 퍼질대로 퍼진 우리 사회의 불공정 개선을 위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당시 이 위원회가 밝힌 3대 의제는 ▲공공기관, 불공정기업의 불공정행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개선시키는 국정감사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한 국정감사 ▲정부부처, 공공기관의 '을' 관련 업무를 철저히 심의하는 국정감사 등이다.
이 가운데 유통 관련 불공정 행위 개선을 위한 의제로는 이 위원회에 접수된 신문고 청원사례 중 개선의 여지가 부족하고, 을지로위원회의 권고와 중재를 거부하는 불공정기업의 불공정행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공정거래질서 확립을 위해 공정거래 심의위원회 또는 불공정행위 고충 처리센타의 설치 ▲상생협의체 구성 ▲사내 불공정행위자 징계 ▲피해자 배상 등을 제도화시킬 것을 요구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민주당 정무위원회를 비롯해 상업위원회 등 총 7개 상임위원회에서는 국순당·배상면주가 등 주류업체, CU·미니스톱 등 편의점 업체, 아모레퍼시픽 등 화장품 업체, 롯데·홈플러스·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 LG유플러스·KT 등 통신업체등을 국감대상으로 선정하고 각종 불공정 행위에 대해 감사를 벌였다.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도 남양유업 사태로 불거진 본사와 대리점 간의 잘못된 거래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전반적인 실태 파악에 착수했다.
공정위는 유제품·주류·비알콜음료·라면·제과·빙과 등 6개 식품업종과 화장품·자동차 분야를 조사 대상 업종으로 선정해 서면 실태 조사를 벌였다. 조사항목은 유통형태별 매출비중, 대리점 유통단계, 보증형태, 계약해지사유, 판매촉진정책, 판매장려금 지급기준, 자료보존실태 등이었다.
이와 별도로 공정위는 본사와 대리점의 불공정 거래관행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도 구성했다. 이 팀에는 공정위 시장감시국장 등 공무원을 비롯해 유통법·공정거래법 관련 외부전문가, 관련 업계 임원, 대리점주 등 외부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CU 가맹점주들이 자체 구성힌 가맹점상생협의회는 전국 CU 가맹점주 투표로 선정된 144명으로 지난해 12월 29일 구성돼 출범했다./CU 제공
◆대표적 '갑(甲)' 업체들…앞다퉈 상생·동반성장 목소리 높여
이렇게 국회와 정부기관의 전방위 압박과 국민들의 지탄이 이어지면서 불공정 기업으로 지목받은 업체들은 자구적 마련에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유통업체들은 우선 '을 되기 운동'이나 '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표현 없애기' 등의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주가 하락과 불매 운동, 검찰고발, 과징금 폭탄 등을 맞은 남양유업의 경우 욕설 파문 후 3개월을 넘기 지난해 7월 18일 새벽 전직 대리점주들의 모임인 대리점 협의회와 전격적인 합의를 통해 ▲피해보상기구 공동 설치를 통한 실질적 피해액 산정 및 보상 ▲불공정 거래 행위 원천 차단 ▲상생위원회 설치 ▲대리점 영업권 회복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김웅 대표는 그동안의 잘못으로 인해 지난 1월 28일 법원에서 징역 1년6월에 사회봉사 160시간, 집행유예 2년을, 회사는 벌금 7000만원을 각각 선고받았다.
불통이 튄 유업계에서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다책마련에 부심했다. 서울우유는 지난해 12월 16일 공정거래 자율준수프로그램의 도입을 알리는 선포식을 열었다. 매일유업도 지난 1월 14일 상생경영 선포식을 열고 제품 강제할당과 공급(일명 밀어내기)을 하지 않고, 부당한 금전이나 편의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대리점 경영에 간섭하거나 판매목표를 임의로 설정하는 행위를 일절 근절하는 등 공정거래 관련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다. 또 대리점과 협력업체의 고충을 처리하기 위해 상생협력팀 신설, 대리점주 자녀 학자금과 자녀출산 지원, 대리점주 해외여행, 경영지원 서비스 제공, 대표이사 간담회 등의 구체적인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야쿠르트는 매년 1월 23일을 '공정거래 자율준수의 날'로 정해 부당한 공동행위, 불공정 거래행위,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 표시광고에 대한 사항 등을 점검키로 했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의 대형 유통업체와 CU 등 편의점 업체들도 납품업체와의 상생과 동반 성장 약속, 점주들과의 원할 한 소통을 위한 자율적 상시 기구 구성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가장 최근까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로부터 지적을 받아 온 화장품 업체도 여기에 동참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 대형마트 입구에 의무휴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형유통업체 의무휴업으로 매출 감소…시민단체들 압박에 SSM(기업형 수퍼마켓) 문 닫기도
지난해 국내 대표 대표 유통업체인 이마트는 올 초부터 지난 10월까지 누적 매출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3.3% 줄었다. 이마트 매출이 전년보다 줄어든 것은 1993년 창동점을 연 이후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개정된 유통산업법에 따라 대형마트는 작년 말부터 월 2회씩 일요일에 의무 휴업을 실시하고, 신규 점포를 낼 때는 지역 상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일요일 매출은 평일 매출의 두 배 이상이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신규 점포는 지역 상인의 허가를 받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이마트는 신도시 등 전통 상권이 없는 곳에서만 두 곳 열었다. 홈플러스나 롯데마트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재래시장 활성화 등의 이유로 각종 규제가 늘면서 대형마트와 SSM의 출점이 쉽지 않게 되자 재벌·대기업들이 변종SSM과 상품공급점 등을 곳곳에서 출점시키고 있어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31일 유통 재벌·대기업들의 대형마트와 SSM 가운데 전국 최초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망원점이 전격 폐점했다. 한 해 매출 80억원 대의 망원SSM의 폐점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지역 중소상공인들의 생존권 보장과 풀뿌리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는 지난 2012년, 2013년 2년여간의 망원시장·월드컵시장 상인회 등 지역 중소상공인들과 지역 주민단체들, 시민사회단체들과 경제민주화 운동 단체들과 야당 들이 혼연일체로 홈플러스 합정점의 입점을 저지한 산물로 합의된 조치라는 것이다. 또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적극적인 경제민주화와 상생책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에 대형 마트에 납품하는 농가·중소 제조업체의 모임인 한국유통생산자연합회는 서울역 등에서 집회를 열어 "농민 소득을 줄이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철회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일유업 임직원은 지난 1월 14일 평택공장에서 상생경영 선포식을 가졌다./메일유업 제공
◆귀 닫은 정부와 기관…뻔히 보이는 대기업과 가맹본부들의 불공정 행위 막을 의지있는지 의문
전반적인 유통업계의 불공정 행위 수법은 비슷하다. 바꿔 말하면 제도적인 보완이 이뤄진다면 오히려 불공정한 사항들을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쟁만을 앞세우는 여야의 대치 정국이 계속되면서 경제민주화 입법들은 빛을 보지 못한채 국회 창고에서 썩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입맛에 맞는 법안들만을 쏟아내고 있다.
그 예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일 국무회의를 통해 가맹사업 시행령 개정안과 경제민주화 관련 3개 법률을 통과시켰다. 공정위는 이 개정안이 이해관계자 및 업계 현실을 반영했다 설명했다. 하지만 이 시행령은 가맹본부의 불공정행위를 근절하고 가맹점주 권익 보호를 위한 가맹사업법 개정 취지에 어긋난 '변질안' '개악안'이라고 시민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여연대와 전국가맹점연합회(준),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 등은 가맹사업법 개정안이 국회와 국민을 기만하고, 전국 가맹점주들의 바람과는 다른 내용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또 법안 개정에 동참한 공정위를 비롯해 규제위, 가맹본부 등을 규탄하고 법만 통과 시키고 국회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가맹사업법 시행령이 개악되는 과정을 막지 못한 여·야 정당과 국회의 역할에도 유감을 표했다.
시민단체들은 통과된 가맹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의 문제점으로 ▲부당한 영업시간 구속을 금지하기 위한 심야 시간대를 오전 1시~오전 7시에서 오전 1시~6시로 1시간 더 단축하고 영업손실 산정 기간을 6개월로 정한 점 ▲허위·과장정보 제공을 차단하기 위한 예상매출액 범위를 1.3배에서 1.7배로 완화 ▲실제매출액과 예상매출액이 차이가 있더라도 산출근거에 객관성이 있다면 허위과장정보제공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단서조항 추가 ▲부당한 위약금 부과 관행을 차단하기 위한 위약금 부당성 판단기준 후퇴 ▲주요 조항 관련 3년 후 재검토 일몰조항 신설 등을 꼽았다.
특히 국민 의견에 귀를 열고 소통해야 할 공정위가 지난해 11월 20일 관련 시민단체들이 제출한 가맹사업법 시행령 입법예고안 문제 및 개선 의견서를 묵살하고 회신은 커녕 공청회와 간담회 요청도 무시했고, 규제개혁위원회를 거치면서 주요 조항에 대해 일몰조항을 신설하는 등 개악안으로 국무회의 통과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입으로만 소통을 외치는 정부와 기관들이 존재하고 수수방관하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국회의원들이 있는 상황에서 또다른 남양유업 사태와 함께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대리점주, 시장 상인들은 늘어 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각 기업의 자정노력도 관심을 가지고 기켜 볼 일이다. 각 기업은 우선 지난해 벌어진 남양유업의 사태를 교훈삼아 재발 방지에 앞서야 한다. 상생위원회의 조직과 실천하지 않는 약속들은 오히려 국민은 물론 대리점주, 협력사들의 비난만을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각 기업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기전에 진정성을 가지고 대리점주, 소비자, 협력사 등과 상생, 동반성장 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런 전제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공정사회를 이루는 길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아모레퍼시픽은 2월 5일 '2014 생산물류 협력사 동반성장총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