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영어
강준만/인물과사상사
한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어 교육 광풍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만원짜리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지 못해 난리고, 자녀의 조기 영어 교육 때문에 기러기 아빠가 늘어나고 있으며, 진학과 취업을 위해 토익·토플 학원이 성행하다 못해 대리시험까지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의 영어에 대한 욕구에는 일종의 광기가 어려 있다. 대체 한국인에게 영어란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인에게 영어란 권력이자 종교이자 공포라고 정의하며 한국 사회에서 최대의 생존 무기로 군림하고 있는 영어에 대해 시대별로 파헤쳐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영어는 이 땅에 들어올 때부터 '권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교권 장악의 수단이자 입신의 수단이었고 '영어를 모르면 패배자가 된다'는 인식이 시작됐다. 해방 이후 미군이 들어오자 미국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 즉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일종의 시대정신이 됐다. 본격적인 수출시대가 열린 70년대에는 영어가 생존의 문제가 됐으며 90년대 국제화와 함께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2000년대에는 영어와 정치가 유착해 대통령 후보들까지 영어교육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우리 영어 교육열은 전쟁을 방불케할 정도이며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저자는 '영어 전쟁'도 대학 입시 문제처럼 그 배경에 서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선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서열 미화만큼이나 서열 타파라는 주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신 그 중간에 '서열 유동화'라는 제3의 길을 제안한다. 노력하기에 따라 서열이 달라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영어 광풍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해결책일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사회와 영어에 대한 그의 분석은 날카롭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