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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교황 방한] 광화문 시복미사 124위 주요 인물



◆윤지충 바오로(1759-1791): 첫 조선 순교자

1759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이 그의 아우이다.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 무렵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다. 1787년 세례를 받은 그는 어머니와 아우, 이종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도 왕래하며 전교에 힘썼다.

1790년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고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별세하자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니 이를 '진산 사건'이라 한다. 이에 조정에서 두 사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고 그들은 충청도로 피신했다가 1791년 10월 중순경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숱한 고문과 배교 권유에도 굴하지 않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1791년 12월 8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나란히 참수의 칼날을 받았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 첫 선교 사제

1752년 중국 강남 지역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스스로 천주교에 입문한 뒤 북경교구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조선에 성직자 파견을 계획했던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신심이 깊고 외모가 조선인과 닮은 주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해 파견했다. 1794년 2월에 북경에서 출발한 그는 압록강이 얼 때까지 요동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에서 파견한 밀사들과 함께 12월 24일 밤 입국했다.

이후 주 신부는 한양의 신자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우고 1795년 부활절에 신자들과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입국 사실이 탄로나자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 비밀리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무를 집행했다.

그가 활동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신자 수는 1만 명에 이르렀으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받기에 이르자 주 신부는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음력 3월 11일 자수했다.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가 5월 31일에 49세의 나이로 칼날을 받았다.

◆강완숙 골룸바(1761-1801): 조선 천주교 여성 리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접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피다 자신이 투옥되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아들(홍필주 필립보, 1801년 순교)를 입교시켰으나 남편은 입교시키지 못했고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지내게 됐다.

한양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완숙은 상경,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주 신부는 그녀를 여회장에 임명해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집은 수색할 수 없음을 이용해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고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가 됐다.

1801년 4월 6일 강완숙은 체포되면서도 주 신부의 피신을 도왔다. 박해자들은 강완숙을 통해 주 신부의 행방을 파악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4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황일광 시몬(1757-1802): "천당은 세상에 하나, 후세에 하나"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은 천민 출신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해 살다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다음 신앙의 자유를 찾아 경상도로 이사가 살았다. 명랑한 성격의 그는 교우들이 천민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며 똑같이 대우해 주자 농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황일광은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했고 정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한 뒤에도 아우와 함께 따라가 땔나무를 해다 팔며 생계를 꾸리는 한편 힘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그는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체포돼 투옥됐다.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말한 그는 다리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매질을 당한 뒤 고향인 홍주로 보내져 참수됐다. 1802년 1월 30일, 나이 45세였다.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신앙으로 동정 지킨 부부

1782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함께 시복될 이경도(가롤로, 1801년 순교)·이경언(바오로, 1827년 순교)과 남매간이고 유중철(요한, 1801년 순교)이 남편이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이익 선생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권일신 형제들과 교류하며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입교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첫영성체를 받은 그는 덕행을 쌓으며 동정 생활을 결심했으나, 당시에 처녀가 혼인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15세 때 그가 어머니에게 동정의 결심을 고백하자 어머니는 이를 존중해 주 신부와 상의했고, 주 신부는 동정 생활을 결심한 호남의 청년 유중철을 이순이에게 소개했다.

1798년 이순이는 유중철의 고향으로 내려가 동정 서약을 했고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시아버지 유항검과 남편 유중철이 먼저 체포됐고, 이순이는 나중에 체포된 뒤 전주의 감옥에 갇혔다.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끌려가던 그는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다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고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2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이성례 마리아(1801-1840):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집안 사람이었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프란치스코, 1984년 시성)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에서 살며 1821년, 조선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될 최양업(토마스)을 낳는다.

수리산(현 경기도 군포시)에 정착해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조성했다. 그 사이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성례도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수리산에서 온 가족과 함께 체포됐다. 고문보다 모성 때문에 번민하던 이성례는 젖먹이 아들이 굶어죽어 가는 것을 보다 못해 신앙을 부인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장남이 신학생 신분으로 중국 유학 중임이 드러나자 다시 체포됐고 형조에 이른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유혹을 이겨내며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가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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