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혐의로 경주배씨 문중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영화 '명량' 측이 15일 "창작물은 창작물로 봐달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이날 경주배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경북 성주경찰서에 '명량' 제작자 겸 감독 김한민, 각본가 전철홍, 소설가 김호경을 고소했다.
비대위는 배설 장군이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고 후손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비대위 측은 "이번 사태를 촉발하고 사태해결에 전적인 책임을 진 소설작가와 영화제작자 및 배급사측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기대했으나 소설작가와 영화제작사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 당사자들에게 연락 한번 없이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가 원하는 것은 훼손된 선조 배설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자손 된 자로서 조상의 명예훼손으로 인해 입은 인격권침해의 상처는 오로지 조상의 명예회복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영화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다음 혼자 도망치다가 안위의 화살에 맞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배설은 1597년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이순신 장군의 허가를 받아 뭍에 내렸다가 도주해 명량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탈주한 배설장군은 2년간 도망치다 1599년 선산에서 권율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됐다. 다만 광해군 때 배설장군이 쌓은 무공이 인정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올라 명예는 회복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배설장군은 왜군에 연전연패한 패전장수로 기록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경상도 지역 무관이던 배설장군은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큰 전공은 없었다.
1597년 배설장군은 경상우수사가 된 후에 커다란 패배를 조선 수군에 안기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웅천 지역에서 배설장군은 왜적선 600여 척과 대전을 벌여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장군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해 안전을 도모했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제작사는 피소에 앞서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배설 장군에 대한 극중 묘사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았다며 "권익위가 16일까지 답변을 요청했다. 제작사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소에 앞서 그동안 제작사의 사과를 기다렸다는 고소인들의 입장에 대해 제작사는 "그동안 (배씨 문중으로부터) 직접적인 연락을 받은 관계자가 없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