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으로 들었소' 뻔하지만 신선한 이유, 유준상의 반전·백지연의 발견/MBC
포장지는 뻔하다. 그러나 내용물이 다르다.
드라마 제목과 배경음악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울려 퍼졌던 OST '풍문으로 들었소'가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OST로 재등장했기 때문. 최민식, 하정우, 김성균 등 조폭 무리가 길거리를 활보하던 장면이 스쳐지나갈 만큼 강렬했던 이 노래를 떡하니 제목으로 낙점한 안판석 감독은 작품의 방향성을 단번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제목이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경쾌하고 흥을 돋우는 음악은 사뭇 진지하다가도 코믹스럽기도 해 8회에 접어든 '풍문으로 들었소'에 제격인 듯하다.
하지만 내용은 뻔하다. 한국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여줬던 재벌男과 가난女의 사랑, 혼전임신, 거액의 돈을 건네며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재벌가의 만행 등 여타드라마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준과 고아성의 키스신과 베드신, 혼전임신 등 자극적인 장면과 빠른 전개는 시청자들의 시선 모으는데 적중했고, 시청자들의 큰 호응 덕분에 '밀회'의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에 호평이 쏟아졌다. 그래서 '풍문으로 들었소' 1회에 그만 뻔 한 드라마로 속을 뻔 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진가는 '유준상의 코믹함'이 두드러지면서 나타난다. 같은 소재도 어떻게 버무리느냐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 준 셈.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일류 상류층의 속물의식을 통렬한 풍자로 꼬집는 블랙코미디 '풍문으로 들었소'는 갑과 을의 강렬한 대립구도에서의 드라마 속 '막장' 코드를 '코믹함'으로 탈바꿈 시켰다. 체면 때문에 뒤돌아 폭풍 눈물을 쏟은 유준상이 밥상을 엎거나 난간을 넘다 중요부위가 걸려 호통을 호소하는 등 몸 개그까지 펼치며 상류층의 양면성을 코믹하게 풍자한 것이다. 손자를 찾을 때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식 앞에선 근엄한 모습으로 돌변하는 유준상의 연기가 이토록 재미날 수 없다.
배우들의 '신선함'이 제대로 먹혔다. 배우들의 명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인상(이준 분)의 아버지이자 법무법인 대표 '한정호' 역의 유준상은 노련한 코믹연기로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맹활약을 펼치고 있어 시청자들과 제대로 '밀당' 중이며, 유준상과 부부 호흡을 맞추고 있는 유호정은 뭇 상류층 여인들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 '최연희' 역을 맡아 '가면'의 탈을 쓴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새로운 이미지 구축, 연기 변신 성공은 물론 '배우 유호정'이 보여주는 신선함이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주로 의사, 검사, 경호실장, 이중스파이, 배신자 등 깔끔한 정장 차림에 카리스마 넘치는 굵직한 연기를 선보였던 장현성이 이번 작품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전형적인 서민 동네에서 성실이 살아가고 있는 가장이자 봄이(고아성 분) 아빠 '서형식' 역을 맡아 성질을 부리다가도 눈물을 쏙 빼는 등 감정변화가 심한 캐릭터를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 이 또한 신선하다. 이밖에도 이들을 지켜보는 제3의 인물들의 언어 풍자 역시 새롭다. 실제 사례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유준상의 비서 길해연과 민소연의 일본어 뒷담화, 백지연의 갑작스런 고아성의 영어 테스트 등 '풍문'으로 들리던 사례들을 극화시킨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순간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수확은 '숨은 보석' 백지연의 발견이다. 배우로 첫 발을 디딘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백지연은 적은 분량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첫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연기력을 펼친 백지연의 활약은 여느 배우 못지않은 모습으로 똑 부러지게 표현해 내 단 몇 회 만에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는데 성공했다. 좋은 드라마에 적절한 배역이 아마도 그에게 큰 '행운'이 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유일한 두 사람. 순수한 고등학생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새로운 조합' 이준과 고아성은 이미 다양한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만큼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찬 모습으로 엉뚱한 매력을 발산하며 제몫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절대 어른스럽지 않은 순수하고 당돌한 면이, '성숙한' 연기보다 '어루숙한' 연기가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통통 튀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공중파에서 볼만한 드라마 말이다. 시청자에 노출된 배우들의 이미지를 역이용한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가 '밀회'보다 더 찐하게, 더 통쾌하게 '풍문으로 들었소'을 그려내고 있어 이들의 조합이 반갑다. 부디 앞으로 펼쳐질 '뻔'한 스토리도 '특별'하게 풀어내 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