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곁에 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젊은 여자에게 마음이 빼앗긴다. 다음달 9일 개봉하는 영화 '화장'(감독 임권택)은 시놉시스를 보고 누군가는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막장 스토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년 남성을 연기한 배우가 안성기(63)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부드러운 이미지 속에 세월의 질곡을 담고 있는 그의 감정 연기는 남자의 욕망을 넘어 서러움과 서글픔,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복잡한 내면을 마음 깊이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훈 작가의 소설 '화장'을 좋아했어요. 중년의 이야기라 와 닿은 부분도 있었고, 수려한 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영화화가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 세월을 살아본 임권택 감독님이 연출을 맡아 작품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4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국민배우'의 타이틀을 얻은 안성기에게도 '화장'에서 연기한 오정석 상무 역은 쉽지 않은 배역이었다. 복잡한 심리와 감정을 촬영 내내 유지하기 위해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촬영이 끝난 시간에도 감정이 계속 연결됐어요. 이 사람의 심리가 단선적이지 않잖아요. 와이프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고, 직장에서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스스로는 전립선 비대증을 앓고 있는데다 부하 직원에 대한 사랑까지 싹트는, 굉장히 복잡한 심리 상태였죠. 자칫 잘못하면 감정의 끈을 놓칠 수 있어서 그것을 유지하느라 힘이 많이 들었죠."
안성기는 "'화장'은 남성의 욕망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 인간적인 아픔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아내가 죽음의 향기라면 젊은 여직원인 추은주는 사랑의 향기에요. 오 상무는 그 중간에 있죠. 오 상무가 아내를 외면한 채 추은주의 향기에 취했다면 다른 형식의 삼각관계 드라마가 됐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영화 속 오 상무는 의도적인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사랑의 향기를 맡게 되는 인물이에요. 이 지점이 우리 영화가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와 차별화 되는 독특하지만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임권택 감독과는 이번 작품이 7번째 작업이다. 2002년 '취화선' 이후 12년 만에 다시 만난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 스타일은 한결 같았다. "감독님과 영화를 디지털로 찍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필름 찍듯 영화를 찍으시더라고요. 디지털이니까 여러 번 찍어도 되는데도 필름 찍듯 한 번 오케이면 그걸로 끝이었어요. 오히려 집중력이 있는 현장이라 더 좋았어요."
오랜만에 공감 가는 작품을 한 만큼 흥행에 대한 기대도 있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할 때 관객들이 진심이 담긴 박수를 보내주더라고요. 우리 영화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반응이 좋아 기뻤고요. 그래서 지금은 개봉한 뒤 일반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다른 영화에 비해서 더 많이 궁금하네요."
아역 시절까지 포함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영화와 함께 한 안성기는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는 위치에 서있지만 있지만 정작 그는 "아직도 연기에서 나아졌으면 하는 부분이 많다"고 자신의 연기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많은 역할을 해봤지만 여전히 해보고 싶은 역할은 많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보면서 순화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따뜻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누구보다도 깊은 영화에 대한 애정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제는 한 세대가 지나면 쉽게 잊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저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를 통해 좋은 시간, 행복한 시간을 많이 느끼게 해주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사진/라운드테이블(김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