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가 급성장하던 시기, 충무로의 중심에는 강제규(52) 감독이 있었다. 연출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를 시작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제시한 '쉬리'(1998), 그리고 1000만 영화의 흥행 신기록을 세운 '태극기 휘날리며'(2003)까지 그의 영화는 한국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영화산업의 외연을 확장해왔다.
그러나 거듭됐던 성공은 '마이웨이'(2011)에서 한풀 꺾이고 말았다. 28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국내에서 214만 관객을 모으는데 그치며 강제규 감독에게 처음으로 흥행 참패라는 불명예를 안겼다.
그로부터 만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의 흥행 실패에 대한 소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잃은 것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얻은 것도 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영화라는 본질에 대해,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는 굉장히 값진 시간이 됐습니다." 시나리오 작업과 중국과의 합작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며 쉼 없이 시간을 보내온 강제규 감독은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로 연출을 재개했다. "영화인으로서의 행복이 아닌 개인 강제규로서의 행복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의 행복감이라고 할까요? '민우씨 오는 날'은 그때마침 단편 연출 제안을 받아서 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민우씨 오는 날'에 이어 선보이는 '장수상회'는 강제규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소박한 규모의 작품이다. 순제작비 37억원에 서울 변두리 마을을 배경으로 소시민의 삶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장수상회'에 대해 "의도적인 변화가 아닌 자연스러운 진화의 한 과정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규모가 달라졌을 뿐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영화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70대 노인에게 찾아온 황혼의 사랑, 그리고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소박한 감성을 잘 그려내기 위해 강제규 감독은 서울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를 주요 촬영장소로 선택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더라도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동화적인 느낌, 따뜻한 정서를 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이 한곳에 밀집할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수유동이 가장 잘 어울리더라고요. 실제로도 마을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인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동네가 있구나 싶었어요."
'장수상회'가 강제규 감독의 전작과 다르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 곳곳에 웃음과 여유가 녹아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극중에 등장하는 중국집 이름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패러디한 '철가방 휘날리며'인 것은 강제규 감독 스스로 전작들의 무게감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는 의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실제로는 미술팀 스태프가 직접 본 중국집 이름이 모티브가 됐다. 강제규 감독은 "특별한 의도는 없는 설정"이라며 "관객도 큰 부담 없이 재미를 느끼길 바랐다"고 밝혔다.
따뜻하고 착한 분위기의 영화지만 다소 무겁게 다가오는 주제도 있다. 바로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다. 재개발을 찬성하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는 관객 입장에 따라서는 의문이 생길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은 "재개발은 서브플롯인 만큼 큰 의미를 갖고 보지 않고 노년의 사랑을 진행하는 서포트의 기능을 하는 설정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재개발이라는 소재가 클리셰 같아 빼는 것도 고민했어요. 하지만 재개발의 의미가 과거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잊고 사는 성칠이 현재 처해 있는 환경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덜어낼 수 없었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희생을 이야기하기 위한 설정으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강제규 감독은 "그동안은 한국영화의 성장기였기에 스스로 기름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의 규모를 확장시키고 외국과의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강제규 감독이 생각하는 화두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지금은 한국영화가 많이 성장했잖아요.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더 성숙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감독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역량이 한국영화를 더 윤택하게 만들 것 같고요. 다음 작품은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장수상회'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라운드테이블(한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