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장병호 기자]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곧 예술이 된다. '무한도전'의 '토토가' 특집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이정현(35)이 보여준 예술적 욕망이었다. 무대 준비 과정에서 보여준 철저함, 그리고 명확한 콘셉트를 추구하는 모습에서 창작에 대한 높은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수로서의 이정현을 재발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정현은 가수이기 이전에 배우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감독 안국진)는 배우로서 이정현이 지닌 재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파수꾼' '잉투기' '소셜포비아' 등으로 한국영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정현은 남편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노동자 수남을 연기했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KAFA Films
이정현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나리오를 읽게 된 것은 단편 '파란만장'으로 인연을 맺은 박찬욱 감독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빌려온 흥미로운 제목에 끌렸고, 단숨에 읽히는 시나리오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만나는 '여자 원톱' 영화라는 점에 사로잡혔다.
수남은 극중 대사처럼 "불쌍한" 여자다. 학교와 사회가 시킨 대로 무엇이든 열심히 해왔지만 정작 수남에게 남은 것은 빚만 잔뜩 안겨준 집, 그리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뿐이다. 하지만 수남은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늘 웃는 얼굴로 세상을 대한다.
"수남을 연기하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세상이 이 여린 여자를 자꾸만 괴롭히고 짓누르잖아요. 그럼에도 수남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정상적인 사람보다 조금 더 맑고 유아스러운 모습으로 수남을 설정했어요. 최대한 긍정적인 모습으로 연기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마음은 정말 슬펐어요."
이정현은 시나리오를 읽고 1시간 만에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만큼 애정이 컸다. 수남의 맑고 여린 면을 보여주기 위해 다섯 살 된 조카의 한글 공부를 지켜보며 수남의 글씨체를 만들었다. 일상에 찌든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대문에서 직접 의상을 사왔다. 극 후반부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세탁소에 갇힌 수남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3주 동안 발톱을 안 깎기도 했다. 캐릭터 표현을 위한 이정현의 철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영화 후반부, 의도하지 않은 복수를 모두 마친 수남이 묘한 표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정현의 연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당혹스러움에서 시작해 슬픔과 분노, 짜증으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뒤섞인 놀라운 표정을 만날 수 있다. 시나리오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던, 이정현이 고민 끝에 만들어낸 장면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남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놀라서 우는 게 일반적일 거예요. 하지만 수남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았어요. 무서워하다 울다 짜증이 날 것 같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현장에서도 감독님이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줬고요. 컷을 안 하고 오래 여러 번 찍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나왔어요."
이정현은 16세 나이에 영화 '꽃님'으로 스크린에 데뷔해 충무로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어린 나이에 느낀 연기의 재미가 컸고, 연기를 통해 표출하고 싶은 에너지도 많았다. 그러나 데뷔작의 이미지 때문에 배우로서의 에너지를 다양한 역할로 쏟아낼 기회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배우 대신 가수로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럼에도 이정현의 마음은 늘 연기에 있었다.
'파란만장'을 시작으로 '범죄소년' '명량', 그리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까지 이정현은 매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면서 다시금 연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암살' 등의 흥행에 힘입어 여배우가 중심인 영화가 조금 더 많이 등장하기를, 그래서 자신도 좋은 작품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영화 연출에 대한 욕심도 있다. "윤종빈 감독과 대학 동기"라며 웃은 이정현은 "열심히 공부해서 40대가 됐을 때 연출도 해보고 싶다"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연기를 통해 관객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는 것이 배우로서 느끼는 가장 큰 희열이에요. 그래서 매 작품 더 많은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고요. 가수 활동도 꾸준히 할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는 가수보다 배우에 조금 더 치중하려고 해요. 가수보다는 배우로 대중에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