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현대증권 매각이 무산되면서 후폭풍이 예상된다. 애초 현대증권 매각은 현대그룹 자구계획의 핵심으로 평가받은 만큼 현대그룹 재무개선 작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겉으론 차분한 분위기지만 경영공백이 예상되는 현대증권의 앞날도 안갯속에 빠질 전망이다.
■현대증권 정상화, 현 경영진 신뢰가 관건
매각이 무산된 현대증권이 20일 오전 이사회를 열어 오는 23일로 예정된 임시 주총 취소를 논의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애초 임시주총의 주요 안건으로는 새 대표로 내정된 김기범 전 대우증권 사장 등 신규 이사진 선임안이 상정돼 있었다. 주총 취소는 매각이 무산된 만큼 임시 주총을 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매각 불발에 따른 자동 수순"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현대증권 인수 절차를 밟아오던 오릭스PE는 지분 인수계약 기한 종료 이후 계약 연장 여부를 논의한 결과, 계약을 해제하기로 결론짓고 이 사실을 지난 19일 현대그룹 측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김기범 전 사장 등이 주축이 된 현대증권 인수단도 자동 해산 수순을 밟게 됐다.
현대증권은 윤경은 현 사장 체제가 당분간 유지되지만 윤 사장도 대주주에 대한 신용공여 혐의 등으로 금융감독원의 징계가 예정돼 있어 경영공백 우려가 제기된다.
금감원은 오는 22일 열리는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윤 사장에 대한 징계 수위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구조조정 등 적잖은 풍파를 겪은 만큼 강한 내성을 갖고 있다"면서 "다만 윤 사장 등 기존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정상화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새 사장까지 내정된 상황에서 매각이 무산됐다는 점에서 직원들의 실망감이 큰 것으로 안다"면서 "집이 팔리지 않았다고 주인이 집을 새단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대그룹 자구계획 영향 미미
현대증권의 매각이 무산되면서 현대그룹의 자구노력도 흠집이 났다.
현대 측은 현대증권 매각이 성공할 경우 자구안에서 밝힌 목표액을 초과달성(3조5870억원)할 것으로 전망해 왔다.
그러나 자구노력에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현대상선은 현대상선 미국법인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테이너 터미널(CUT)과 시애틀 타코마 터미널(WUT)의 지분 일부(49%)를 매각해 15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으나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미국 사모펀드 린지골드버그 등과 가격에서 이견을 보이며 무산됐다.
벌크전용선 사업부 매각작업도 지지부진하다.
이에 현대그룹은 미국의 터미널 2곳과 벌크전용선 사업부를 떼어내 별도의 자회사(현대벌크라인)를 만든 뒤에 영구전환사채(이하 영구채)를 발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일각에서는 신용강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자칫 자금조달 비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자구계획 이행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당장 발등에 불도 껐다.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은 이달 23일 현대상선이 갚아야 할 2000억원의 대출에 대해 만기를 연장해 주기로 했다. 현대상선은 지난 4월 현대증권 매각으로 자금이 들어오면 갚는 조건으로 산은에서 이 돈을 빌렸다.
이달 22일 상환해야하는 3716억원도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통해 차환이 이뤄질 예정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증권 매각을 제외하고도 현대상선의 유상증자 등으로 이미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계획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면서 "자구안 달성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대증권 매각을 다시 추진할지 여부 등을 포함해 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도 현대그룹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려는 크지 않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자구노력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긍정적이다"면서 "현대증권 매각에 따른 재무리스크 재연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대우증권 매각 등 M&A시장 후폭풍 없다
시장에서는 증권가의 구조조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인수합병(M&A)이다. KDB대우증권, LIG투자증권 등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KDB대우증권 등의 매각 흥행 여부와 현대증권 매각 불발은 다른 문제라는게 업계의 설명이다.
KDB대우증권은 KB금융지주와 미래에셋증권이 맞불을 놓고 있다. 자본금 4조원, 총자산 34조원 규모의 대우증권이 누구 품에 안기느냐에 따라 금융투자업계 지각변동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LIG투자증권은 JB금융지주 등이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 상태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현대증권의 매각 불발은 파는 쪽 보다는 오릭스의 의지가 문제 였다"면서 "대우증권은 업계의 판도를 흔들 만큼 매머드급 매물이다"면서 고 말했다.
한편 오릭스는 전날 배포한 자료를 통해 "투자자 구성과 관련한 문제로 금융당국의 대주주 승인 심사가 3차례에 걸쳐 연기되는 와중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지속적으로 보도·재생산됐다"면서 "일본계 기업의 한국 증권사 인수에 대한 악의적이고 배타적인 비난 여론으로 악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매각 불발을 시장과 여론의 탓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