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장병호 기자] 느림과 춤.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한희정(36)은 "역동적인 동작을 느리게 펼쳐놓을 때 춤처럼 느껴지게 하는 지점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한없이 느리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리듬감, 한희정의 새 미니앨범 '슬로우 댄스'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슬로우 댄스'는 2년 전 나온 정규 2집 '날마다 타인'과는 또 다른 정서를 담고 있다. 전작이 다소 실험적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정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다. 몸을 소재로 삼은 앨범 커버와 사진에서도 그런 정서를 잘 느낄 수 있다. 타이틀에 담긴 '느림'은 이번 앨범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발라드처럼 느린 노래를 만들면 어떨지 궁금했어요. 그냥 음악만 느린 것은 재미없을 것 같았어요. 주제를 '느림'으로 정하고 여러 가지 느린 것들에 대해 노래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목을 아예 '슬로우 댄스'로 정해서 작업을 했어요. 물론 제 노래가 대부분 템포가 빠른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느림'을 콘셉트로 앨범 작업을 하니 또 다른 느낌이 들더라고요."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곡인 '슬로우 댄스'는 어느 연극을 본 뒤 느낀 경험이 바탕이 됐다. "댄스가 꼭 춤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고의 움직임처럼 생각되기도 해요. 예전에 일본 연극을 본 적 있어요. 일상생활의 의미 없는 동작을 보여주는데 그게 춤이 아니면서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걸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지난 2집 타이틀곡 '흙'에 이어 '슬로우 댄스'도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했다. 음악 작업을 하면서 떠오른 영상과 이미지를 구체화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두 번째 트랙인 '가능한 일'과 '그녀와 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가사가 귓가를 사로잡는다. '가능한 일'에서 한희정은 "오늘 밤 가능한 것을 가능한 만큼만 해요"라고 노래한다. 보도자료에는 짝사랑에 대한 노래라고 나와 있지만 한희정은 "그냥 그렇게 쓴 것"이라며 웃었다. "'가능한 일'이라는 텍스트에서 오는 이상한 느낌이 재미있었어요. 같은 리프를 반복하는 피아노, 그리고 한 음만 내는 바이올린과 첼로와 함께 생겨나는 묘한 느낌을 만들고 싶었어요. 굳이 가사나 의미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와 나'에 대해서도 "묘한 제목을 먼저 지은 뒤 만든 노래"라며 "노래 내용보다 듣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희정의 세 번째 미니앨범 '슬로우 댄스' 커버./파스텔 뮤직 제공
'순전한 사랑 노래'는 보사노바 리듬을 차용한, 수록곡 중 가장 리드미컬한 노래다. 그러나 정작 노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어적인 제목이라는 것이 한희정의 설명이다. 마지막 곡인 '오래오래'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생긴 감정을 담았다. "나도 살아있는 게 징글징글한데 외로움을 타는 고양이를 보면 '너도 참 징글징글하구나' 싶어요(웃음). 그래도 이렇게 같이 살아 있으니까 '오래오래 건강히 살자'는 생각이 들어 쓴 노래에요."
한희정은 지금 인디 신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수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음악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한희정은 밴드 더더와 푸른새벽을 거쳐 솔로로 활동을 하며 2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미니 앨범을 디스코그래피에 채우게 됐다. 누군가에게는 부러울 수 있는 음악 여정이다.
그러나 한희정은 "앞으로 가야할 길이 까마득한데 지금까지의 일들을 돌아보지는 않는다"며 웃었다. "아직도 어디로 갈 지 모르겠어요. '나 어디로 갈까?'라는 생각으로 계속 작업하고 있죠." 그는 "마음은 느긋해도 행동은 빠릿빠릿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반대인 것 같다"고 말했다. 느긋함이야 말로 한희정 음악의 매력이다. 새 미니앨범을 낸 한희정은 내년 1월 31일로 예정된 단독 공연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음악·영화·책 등이 다 별개의 작업 같지만 예술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제가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을 '도전'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다 맞물리는 지점이 있으니까요. 지금 노래를 하는 내가 궁극적인 내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지금의 모습도 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노래를 하는 나, 연주를 하는 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나,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나가 있는데 다 연결이 되니까요. 음악을 하면서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에요."
사진/파스텔 뮤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