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장병호 기자] 한은정(35)이 4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김인식 감독의 신작 '세상끝의 사랑'을 통해서다. 남편이자 아빠를 떠나보낸 뒤 단둘이 지내온 두 모녀가 한 남자의 등장으로 겪는 갈등과 파국을 그렸다. "연기로 각인될 수 있는 작품"을 기다려온 한은정으로서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여자 캐릭터가 이야기 중심에 있다는 점이 한은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선뜻 출연을 결심할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부터 영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렇게 영화를 선택하기까지 한 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아니더라도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해야 하는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려운 작품이라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고요. 하지만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배우로서 한 스텝 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 영화에서 한은정은 대학강사 자영을 연기했다. 미모와 지적인 매력을 모두 갖춘 대학 강사다. 폭력을 일삼던 전 남편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영과 자영이 일찍이 결혼해 낳은 딸 유진(공예진), 그리고 자상한 모습으로 이들에게 다가오는 남자 동하(조동혁)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계의 극단적인 단면을 이야기한다.
한은정이 '세상끝의 사랑'을 어렵다고 받아들인 것은 캐릭터의 감정 표현 때문이었다. 영화를 연출한 김인식 감독은 '로드무비' '얼굴없는 여자' 등 개성 넘치는 작품을 주로 선보여왔다. '세상끝의 사랑'에서는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심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들이 처한 상황과 행동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캐릭터를 이해하고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큰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은 영화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걸 안 좋아하세요. 영화에도 관객들이 생각을 하게끔 암전을 중간마다 넣었죠." 한은정의 말처럼 영화는 인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왜 자영이 동하에게 끌렸는지, 동하는 왜 자영과 결혼을 했으면서도 유진을 향한 마음을 지우지 않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한은정은 끝내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자영을 보면서 "불쌍한 여자"라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자영을 이해하며 연기하고자 노력을 쏟았다.
누군가는 '세상끝의 사랑'을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은정은 "우리 영화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도 친구의 친구를 좋아하는 일이 있잖아요.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는 일들도 많고요. 우리 영화는 단지 설정을 모녀와 한 남자로 설정했을 뿐 현실에서 크게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관객 입장에서 공감할 수도 있고 대리만족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관객 입장에서는 불친절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한은정은 "그런 불편함도 즐겨주면 좋겠다"며 웃었다.
"우리 영화는 세 남녀의 관계가 사랑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신 본능적인 사랑의 감정에 대한 위험성을 다룬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그만큼 사랑의 깊이를 이야기하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현실을 미화시키고 꾸며낸 영화는 아니에요. 진짜 현실 세계의 민낯처럼 사랑을 그린 영화죠. 그러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즐겨주면 좋겠어요. 분명 누군가는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니까요(웃음)."
김인식 감독이 한은정을 캐스팅한 것은 그동안 보여준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가 자영과 잘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한은정 또한 자신이 가진 이미지를 잘 알고 있다. "딱 부러지는 모습이 있죠. 처음에는 그런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런 이미지도 좋아요. 굳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연기로 풀어야 하는 숙제니까요." 실제로 한은정은 딱 부러지는 성격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지만 제 자신에게는 굉장히 타이트해요. 저만의 기준이 있어서 그걸 꼭 지키려고 하거든요. 하지만 때로는 그런 부분이 연기할 때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연기할 때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놀 때는 놀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웃음)."
연기 활동 초반에는 "배우로서 입지를 굳혀야한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데뷔 16년차에 접어든 지금 한은정은 "크게 욕심을 내거나 목표를 정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여유를 갖게 됐다.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항상 상큼하고 싶고요(웃음).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이요? 긍정적이고 맑은 생각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