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가입 숙원 이뤘지만 IMF 사태 초래 그림자
[메트로신문 연미란 기자]김영삼(YS)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 나이로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군정(軍政)의 상징으로 여겨진 '하나회' 숙청을 계기로 30여년에 걸친 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경제개혁 기반의 문민정부를 연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선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의 경제개혁을 펼쳤고, 대외적으로는 숙원이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이뤄내며 국제무대에서 한국경제의 위상을 높였다. 실패로 귀결됐지만 차별화된 재벌개혁을 목표로 '신재벌정책'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국가채무가 쌓이면서 IMF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가 모두 경제 정책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셈이다.
◆'칼국수' 정신으로…하나회 해체·금융실명제 '부패 차단'
하나회 해체는 그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 주도로 결정된 비밀 조직이다. 이들은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 등에 참여하며 군정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1993년 4월 익명의 군인에 의해 살포된 하나회 명단 입수를 계기로 부패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당시 전두환·노태우 등 관련자들이 재판에 회부되면서 문민정부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투명성을 강조하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은 '칼국수'로 상징된다. 서민 음식의 대표로 여겨지는 칼국수는 그의 정치적 신념과 맞물려 각종 녹아들었다. 경제의 투명성은 그의 업적 중 최대 성과로 꼽힌다.
가명·차명을 이용한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와 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에 따라 그의 경제 개혁 의지는 금융·부동산실명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1993년 2월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그해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시행했다.
그의 경제개혁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법 도입으로 검은 돈이 부동산으로 쏠릴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 차단을 위해 1995년 1월 부동산실명제를 실시했다. 입법 절차는 3주 만에 신속하게 이뤄졌다. 한국 경제 규모의 확대와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기업창업·공장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를 간소화시키는 규제개혁에도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4년차인 1996년 12월 OECD 가입을 이뤄내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에 대응했다. 김영삼 정부의 이 같은 행보는 한국경제의 위상을 한 단계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IMF사태 초래…'통한'의 그날과 서거일 겹쳐
그러나 세계화에 따른 급속한 시장개방으로 대기업의 줄도산 등 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김영삼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게 됐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가 이어졌다.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뒤이어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은 30조원을 넘어섰고, 금융 시장 혼란은 한국 금융 위기로 확대됐다. OECD 가입에 따른 부작용 최소화에 대한 사전준비를 하지 못한 채 급속한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 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22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일은 공교롭게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한 통한의 그날과 겹치게 됐다.
◆동반자이자 경쟁자 '양김 시대의 종언'…역사 한 페이지 장식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굴곡의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었던 '양김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영·호남을 대표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굴곡진 역사만큼 굴곡의 연속이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2009년 8월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병문안한 자리에서 그와의 관계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로 정의한 바 있다. 민주화 앞에서 동반자였던 그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경쟁자가 됐던 지난 날을 함축한 소회였던 셈이다.
실제 그랬다.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과 전남 신안의 외딴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DJ는 태생부터 달랐다. DJ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며 자수성가로 정치권에 입문했다면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27세 최연소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전격 당선했다.
출신배경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군정 시대, 독재 시대를 이르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한국 야당사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1970년 대선후보 경선, 1987년 대선, 1992년 대선은 두 사람이 정치적 명운을 걸고 진검승부를 펼쳤던 역사의 변곡점으로 평가된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DJ가 1985년 귀국한 뒤, DJ의 동교동계와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는 두 사람을 공동의장으로 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정했다. 이들은 12대 총선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 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며 꺼져가는 민주화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7년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끝내 분열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각각 언론 인터뷰와 회고록에서 '양김의 분열'을 떠올리며 통탄했다. 서로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반목했던 관계는 김 전 대통령이 DJ가 서거를 앞둔 2009년 병문안을 하며 22년 만에 비로소 해소됐다. 이날 김 전 대통령이 6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난 DJ의 뒤를 따라가게 영면의 길로 떠나게 되면서 한국 현대사 격랑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