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42)은 영화를 사랑한다. 가진 것 하나 없던 20대 초반 배우의 꿈을 향해 무작정 몸을 내던졌던 그는 영화에서 힘과 위안을 얻으며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7일 개봉하는 '나를 잊지 말아요'(감독 이윤정)에서 정우성은 배우이면서 동시에 제작자로서의 역할을 도맡았다. 그의 변함없는 '영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변신이다.
◆ '배우' 정우성, 대중이 바라던 이미지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10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그런 남자 앞에 나타난 비밀스러운 여자. '나를 잊지 말아요'는 이 두 남녀의 감정을 찬찬히 따라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멜로영화다. 정우성은 기억을 잃은 남자 석원 역을 맡아 김하늘과 호흡을 맞췄다. 2009년 '호우시절'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정우성표' 멜로로 관심을 모았다.
'감시자들'이 개봉했을 당시 정우성은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모습은 남자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이었고 그래서 '신의 한 수'를 선택했다. 이어진 치정극 '마담 뺑덕'은 배우로서 다시 변신에 도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정우성에게 바랐던 모습은 따로 있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와 같은 멜로영화 속 모습이었다.
"관객들이 저의 이런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이번 작업을 통해서 알 수 있었어요. 사실 이 영화는 배우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 기획한 작품이었거든요. 때마침 관객의 기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정우성에게 사랑은 '판타지'다. "일상에서 찬란한 판타지가 일어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해요. 남의 사랑 이야기에는 '진짜야?'라고 놀라면서도 자신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정우성은 "멜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감정의 판타지'에 충실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마음으로 석원의 캐릭터에 빠져들었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내면의 불안함을 간직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온 여자 진영(김하늘)에 대한 감정 변화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펼쳐보였다.
영화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석원의 멍한 표정으로 막을 연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는 그런 석원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켜주고 싶었던 여자 진영의 모습이 기억에 더 남는다. 그래서 정우성은 영화가 자신의 영화가 아닌 김하늘의 영화로 남기를 바란다. 멜로영화야말로 여배우가 빛나는 영화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클리셰인 설정이죠. 그러면서도 전형적이지 않은 퍼즐 맞추기 식의 전개를 갖추고 있고요. 하지만 우리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인물은 석원이 아니고 진영이고요. 사랑의 아픔까지도 직시하는 진영을 통해 사랑에 대한 용기를 전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진영의 영화가 됐으면 해요."
◆ '제작자' 정우성, 다양성을 지닌 영화판을 바라다
정우성은 배우 이전에 제작자로 '나를 잊지 말아요'를 먼저 만났다. 2011년 미쟝센단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동명의 단편영화가 그 계기였다. 독특한 무드가 있는 단편에 매료된 정우성은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윤정 감독의 이야기에 선뜻 제작자로 나섰다. 색다른 시나리오였으나 투자가 수월하지 않자 영화계의 선배 입장에서 기회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정우성은 "배우와 감독이 감성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역할이라면 제작자는 충만한 감성의 작업자를 이성적으로 제어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언뜻 배우와 제작자는 함께 가져가기 힘든 역할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배우였기 때문에 제작자로서도 더욱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제작자가 촬영 현장에 상주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저는 제작자가 현장을 자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바로 잡아주고 서포트하는 것이 제작자가 하는 역할이니까요. 배우 입장에서 제작자가 현장에 없는 게 더 편하지 않냐고요? 제작자가 현장에서 걸림돌이 된다면 그건 제작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죠."
정우성과 이윤정 감독의 인연은 2008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윤정 감독은 영화의 스크립터였다. 그러나 정우성은 "이윤정 감독이었기에 이번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영화 제작의 기회를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무렵 때마침 이윤정 감독의 작품과 만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정우성이 세운 영화사 '더블유 팩토리'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정우성은 앞으로도 중·저예산의 가능성 있는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다. 한국 영화판에서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그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이는 배우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어나갈 수 있는 든든한 영화판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20대는 어떤 체계나 현실에 대한 불만을 나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고 30대는 방황을 해도 되는 나이에요. 하지만 40대는 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이미 그 시간을 겪어온 기성세대니까요. 선배의 입장에서 불만과 잘못된 점을 바꿀 행동을 해야 할 때인 것이죠. 후배가 범할 실수도 바로 잡아줘야 하고요. 그게 세대 간의 교류이고 소통이라고 봐요. 영화판도 이런 것이 가능할 때 더 튼튼하고 안정적이 되겠죠."
정우성과의 인터뷰에서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장편영화 연출에 대한 질문이다. 어김없이 질문이 나오자 정우성은 매니저를 향해 "당장 스케줄을 잡아야겠다"며 크게 웃었다. 분명한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감독' 정우성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상에 깃든 판타지처럼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