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버스에서 우연히 두 여고생의 대화를 듣게 됐다. 곧 개봉을 남겨둔 영화가 대화의 화두였다. 소녀들은 "이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면 꼭 보고 싶다"며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 배우는 10대 아이돌 출신 배우도, 20대 청춘스타도 아니었다. 바로 황정민(45)이었다.
지난 1년여 동안 황정민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베테랑'과 '히말라야'까지 연이은 흥행으로 생겨난 수식어다. 최근 CGV 리서치센터의 발표에서도 황정민은 '2015년 관객이 가장 믿고 보는 배우' 1위에 올랐다. 바야흐로 '황정민 전성시대'다.
그러나 주변의 떠들썩한 반응에도 황정민은 변한 것이 없다. "기분은 좋아요. 어느 순간 '안 믿고 보는 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는 자신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이 자신만의 의지만으로 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영화를 시작하면서 늘 똑같은 태도로 작품을 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믿고 보는 배우'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해답은 나와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하면 되는 거죠."
황정민이 '검사외전'을 선택한 것도 작품을 고르는 변함없는 기준에서였다. 많은 배우가 그러하듯 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좋다면 어떤 감독, 어떤 배역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작품 선택 기준이다.
'검사외전'은 살인 누명을 쓴 검사 변재욱(황정민)이 교도소에서 만난 사기꾼 한치원(강동원)과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의 영화다. 권력을 향한 정치인의 암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부당거래'나 '베테랑'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적인 메시지보다 오락영화의 장르적 재미에 보다 충실하다. 황정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바로 '팝콘무비'처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재미'였다.
전작 '히말라야'에서 느낀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황정민은 변재욱을 통해 영화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판'을 깔아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변재욱도 한치원처럼 가벼운 성격이었어요. 하지만 변재욱만 놓고 본다면 교도소에 갇힌 5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는 자아성찰의 시간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밑바닥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묵직한 모습으로 가는 게 낫다고 봤어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변재욱의 모습은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의 연장선에 있다. 다혈질이면서도 정의로운 모습이 그렇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낸 뒤 등장하는 변재욱은 이전과는 또 다른 황정민의 모습이다. 짧게 자른 머리에 많은 사연을 담은 표정으로 남다른 존재감을 남긴다. '검사외전' 속 재미는 바로 이 묵직한 변재욱과 한없이 가벼운 한치원의 조화에 있다.
누군가는 황정민의 연기를 놓고 '작품마다 비슷하다'는 반응을 내놓는다. 그것은 황정민이 그만큼 캐릭터보다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그가 "이야기를 하면서 인물이 살아 숨쉬는 것이지 이야기가 없는데 어떻게 그 인물이 있겠냐"고 말하는 이유다.
그래서 황정민은 지금까지 해왔듯 쉬지 않고 작품을 해나갈 생각이다. "저는 작품마다 늘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그럼에도 관객이 그 다른 지점을 몰라준다면 배우로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겠죠. 그렇다고 작품을 쉴 생각은 없어요. 저는 일에 대한 고민은 일을 하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 중 하나거든요."
그의 고민은 머지않아 해결될 것이다. 최근 촬영을 마친 '아수라'에서는 '악의 근원'과도 같은 인물로 또 다른 변신을 선보였다. 여기에 나홍진 감독과 함께 한 '곡성'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상반기 중에는 류승완 감독과 함께 '군함도'의 촬영에 들어간다. '황정민 전성시대'는 당분간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작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감수해야 할 것과 고쳐야 할 것, 그리고 고민해야 할 지점이 생겨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것들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이겠죠. 그렇게 성장하면서 다음 작품에는 무언가를 또 얻을 것이 생길 거라 믿어요. 그러기를 늘 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