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경(21)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써니'와 '수상한 그녀'로 심은경을 기억한다면 '널 기다리며' 속 심은경의 모습은 무척 낯설 것이다. 익숙했던 엉뚱하고 발랄한 모습 대신 속을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캐릭터가 스크린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반된 변화만큼이나 심은경은 지난 1년여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성장통의 시간'이었다.
'널 기다리며'는 15년 전 아빠를 죽인 범인이 교도소에서 출소하기만을 기다려온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영화다. 심은경은 주인공 소녀 희주 역을 맡았다. 어린 나이에 아빠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희주는 그날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겉보기에는 순수해보이지만 그 속에는 복수를 꿈꾸는 잔인함이 있다.
스릴러 장르에 로망이 있었던 심은경에게 '널 기다리며'는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특히 희주의 양면성에 끌렸다. "순수함과 잔인함이라는 이중성은 다른 스릴러에서도 그려진 것이지만 희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어요. 흔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에 제가 더 예민하게 반응했죠." 심은경은 영화 속 희주의 얼굴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희주를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한 고민이 이어졌다. 극단적이고 광기 어린 모습, 그리고 이중성을 하나의 성격으로 체화한 모습 중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고민했다. 심은경의 선택은 후자였다. "순수한 소녀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질문하는 영화"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김성오가 연기한 범인 기범이 '절대악'이라면 희주는 그런 악함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심은경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플랫하게' 연기했다.
물론 심은경 개인으로 희주를 바라볼 때는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오히려 그 복잡한 마음 자체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가득한 희주의 방이 등장할 때가 그랬다. "처음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압도되는 게 있었어요. 이 기분은 뭘까 싶더라고요. '희주는 고립될 수밖에 없는 친구구나' 싶었죠. 소름 돋는 기분이 있어서 이걸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게 내 방이야, 어때?'라는 느낌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했어요(웃음)."
'널 기다리며'의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심은경은 유독 '성장통'이라는 말을 많이 꺼냈다.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 이후 겪은 고민 때문이었다. "제가 원해서 선택한 작품이라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연기적으로 많이 실망을 했기에 힘들었어요." '써니'에서 '수상한 그녀'로 이어진 흥행과 기대 이상의 평가, 곧바로 이어진 '내일도 칸타빌레'의 저조한 성적 속에서 심은경은 누구나 한번쯤 거쳐야만 하는 성장과 고민의 시간을 겪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았어요. 매 작품마다 저의 진심을 보여주기보다 연기를 잘 하려고만 했더라고요. 행복하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건데 말이죠. 얼마 전 도쿄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열심히 연기하고 인정을 받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건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이제야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 같아요. 마음도 편해졌고 연기도 더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고요."
물론 성장통 속에서도 심은경은 마냥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역할과 작품을 찾아 쉼 없이 촬영장을 누볐다. '널 기다리며'를 시작으로 '조작된 도시' '궁합' 등이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 봄과 함께 '걷기왕'과 '특별시민'의 촬영도 곧 이어질 예정이다. 성장통을 이겨낸 심은경은 배우로서 더욱 단단해진 모습으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작년에는 하고 싶은 영화를 막 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작품을 많이 한 건지 괜히 민망해요(웃음). 개봉을 조금 미루면 안 될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작품마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진심이 잘 전달됐으면 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 뿐이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