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칼을 뽑아 든 가운데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각 기관의 입장차가 뚜렷하다. 일각에선 우리나라 경제의 틀이 저성장·저물가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는 만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경기 활성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한은은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필요성과 타당성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입장이다.
◆"한은 변화해야" vs "독립성 훼손돼"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일(현지 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달라진 국내 경제 상황에 대해 한은도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환경 변화에 따라 경제정책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해야 한다"며 "필요하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고, 함께 병행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해 필요 자금조달 방안으로 한은에 발권력 동원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은은 발권력 동원은 중앙은행으로서의 원칙과 법적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역할이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4일(현지 시각) 마찬가지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의 요구안에 대해 국책은행 지원을 위한 자본 확충 방안으로 회수가 불분명한 현금 출자보단 대출 방식의 '자본확충펀드'를 제시했다. 자본확충펀드는 한은이 시중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하면 은행들은 그 자금으로 펀드를 만들어 다시 시중은행에 대출한다. 지난 2009년 한은은 산업은행에 3조3000억원 가량을 대출, 시중은행들의 자본 조달이 원활해진 후 원금을 회수한 바 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 있어 어떠한 역할이든 수행해 국가적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며 "다만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기업 구조조정에서 동원되려면 납득할 만한 필요성과 타당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 관계자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면 앞으로 기업이 성장하고 부진하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특정 산업에 대한 한은의 발권력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다"며 정부 요구안에 대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본확충 해법 마련 협의체 출범…"모든 가능성 열어둬"
지난 4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으로 구성된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가 출범했다. 이날 첫 회의를 통해 협의체는 올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자본확충 해법을 내놓기로 합의했다. 협의체 출범 당일 독일 프랑크푸트르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회의에 참석 중이었던 유 부총리와 이 총재 역시 귀국, 이번 주부터 가시적인 방안 마련을 위해 방안 마련에 속도를 올린다.
정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이곳저곳에서 확실하지 않은 방안을 내놓고 있다"며 "협의체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빠른 시일 내에 검토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재정과 통화정책을 적절히 조합하여 자본확충 방침을 세우겠다는 입장이다. 유 부총리는 지난 1일 자본확충 방안과 관련 "폴리시 믹스(Policy Mix, 정책 조합)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달 말 개회하는 '여소야대' 20대 국회 내에서 정부가 야권의 협조를 얻는 데 있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국회를 거치지 않는 방안들이 우선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동원 가능 수단으로 먼저 추가경정예산 편성, 세계잉여금 출자, 정부 보유 공기업 주식 현물출자 등을 들고 있다. 이 중 추경은 자본확충 규모가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국회 표결이 선행되어야 해 가급적 고려되지 않을 해법으로 보인다. 또 지난해 2조5000억 원가량의 세계잉여금 중 국가채무 상환 등에 써야 할 액수를 제외한 여유분 등은 전용하는 방법은 일단 정부 결정만으로 신속히 이뤄질 수 있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꼽힌다. 한국전력공사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정부가보유한 공기업 지분을 현물 출자하는 방시도 자금 규모가 한정적이지만 국무회의 의결로 시행 가능성이 있다.
한은이 할 수 있는 방안으론 자본금 직접 출자, 산업금융채권 또는 수출입금융채권 인수, 코코본드 매입 등이 논의되고 잇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요구하고 나선 자본금 직접 출자 방식 대신 한은이 자본확충펀드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이른바 '폴리시 믹스'를 둘러싼 경우의 수가 한층 복잡해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