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오세성 기자] 지난 7일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구 명예회장은 범LG그룹 창업 1세대 마지막 생존자였다. 고(故) 구재서 씨와 진양하 여사의 넷째 아들이며 형제로는 인회·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씨가 있다. 이중 맏형 고(故) 구인회 씨는 LG그룹 창업주다.
◆구인회포목상점으로 LG그룹 일군 구인회 창업주
구인회 창업주는 1931년 7월 철회 씨와 함께 '구인회포목상점'으로 사업을 시작해 1947년 1월 LG화학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했다.
락희화학의 최초 제품인 럭키크림은 세련된 디자인과 향 때문에 중국 상하이에서 들여온 외제품이라는 소문이 나며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럭키크림 판매량이 많아지자 용기 뚜껑이 파손돼 반품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인회 창업주는 플라스틱 생산에 뛰어들었고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을 비롯해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머리빗, 칫솔 등을 출시했다.
플라스틱 사업은 락희화학이 럭키크림으로 벌어들인 3억원에 추가로 빌린 2억원이 투자됐다. 초기 투자비가 너무 많아 반대가 많았지만, 구 창업주의 설득에 플라스틱 제품을 양산할 수 있었다. 1950년 한국 정부가 6·25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했던 시기 상무부 장관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락희화학 플라스틱 머리빗을 선보이자 대통령이 "정말 이것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냐"며 감격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구인회 창업주는 1959년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하며 LG그룹 기틀을 마련했고 1969년 63세로 생을 마쳤다. 이후 아들 구자경 LG명예회장에 이어 장손 구본무 LG 회장이 장자승계 원칙에 따라 그룹을 이끌고 있다.
◆1세대 시작과 2세대 시작을 이은 LG家 정신적 지주 구철회 창업고문
구철회 LG 창업고문은 구인회포목상점 창업 자금 3800원 중 1800원을 조달하며 형과 사업을 일궜다. 락희화학과 금성사 사장을 역임했고 구인회 창업주 사후 LG그룹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앞장서서 정리했다.
당시 재계는 구 창업주의 다섯 동생과 여섯 아들 중 누구에게 경영권이 돌아갈 지에 이목이 쏠렸다. 구인회 창업주 사후 처음 열린 1970년 1월 시무식에서 구철회 고문은 "생각하는 바가 있다"며 조카 자경을 2대 회장으로 천거했다. 이미 구인회 창업주 와병기간 동생과 조카들에게 뜻을 알렸던 터라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구철회 고문은 이후 6년간 럭키그룹 운영위원회 의장을 맡아 구자경 회장이 기반을 다지도록 돕다가 1975년 세상을 떠났다.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 등 그의 자녀들은 LIG로 분가한다.
◆공전의 히트작 럭키크림 만든 구정회 사장
셋째 구정회 금성사 사장은 구인회 창업주가 1945년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 '럭키크림'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흥업사는 창립 후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 목탄 사업을 시도했다. 구인회 창업주는 숯을 구하러 일본 대마도로 갔지만 태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후쿠오카에 배를 정박했고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조선흥업사가 마땅한 사업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구정회 사장은 당구장에서 김준환이라는 친구를 사귄다. 김준환은 흥아화학공업에서 '아마쓰크리무'라는 화장품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구정회 사장의 설득으로 구인회 창업주는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고 해방 직후 아낙네들 사이에 화장품 바르는 것이 유행이 되며 큰 성공을 이뤘다.
화장품 사업이 성공하자 김준환 씨를 영입해 공장을 세워 생산을 시작했다. 구정회 사장이 모두에게 행운을 준다는 의미의 '럭키크림'을 작명하며 락희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안 깨지는 크림통부터 국회부의장까지 정·재계 휩쓴 구태회 명예회장
넷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은 구인회 창업주의 요청으로 락희화학공업사에 합류해 럭키크림을 개량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럭키크림이 출시되고 미제, 일제에 비해 절반 가까이 저렴한 가격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품질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구인회 창업주는 일본 메이쇼쿠 화장품을 본 후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구태회 명예회장을 불러 반투명 크림 개발을 지시했다. 서울에 연구소를 차린 구태회 명예회장은 불투명한 럭키크림을 대체할 고품질 반투명 크림을 개발했다.
럭키크림 원가 절감을 위해 제품 원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향료 직수입도 성사시켰다. 한국에 독점 공급하던 회사를 대신해 일본에서 직수입을 하자 향료 가격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제품 판매가 늘자 유통 과정에서 크림통 뚜껑이 자주 깨진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전공자가 아닌 구태회 명예회장이었지만, 일본에서 플라스틱 제조법이 담긴 책을 들여와 독학하며 플라스틱 제조에 성공했다. 이 덕에 럭키크림의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이 탄생했고 럭키화학공업이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1958년 진양군(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4대 민의원을 지냈고 이후 6~10대 국회의원을 지내 6선 의원이 됐다. 1973년 무임소장관(현 정무장관)을 2년간 맡고 1976년 국회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2년 LG그룹 창업고문으로 사업에 복귀했다.
◆훌라후프와 치약… 정유사업 이끈 구평회 명예회장
다섯째 구평회 E1 명예회장은 국내에 훌라후프를 전파한 인물이다. 락희화학 지배인으로 근무하던 그는 당시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미제 '콜게이트' 치약을 대체할 국내 치약 제조법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결국 콜게이트 관련 회사를 통해 콜게이트의 치약 제조법을 알아냈고 한국인의 취향에 맞춰 스피아민트향을 첨가하며 럭키치약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훌라후프를 접한 구평회 명예회장은 락희화학에서 제조하던 플라스틱으로 국내 제품을 출시했다. 여가와 운동에 좋다는 광고가 곁들여지자 훌라후프는 도시부터 농촌까지 남녀불문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운동기구가 됐다.
1965년에는 신사업을 찾아오라는 구인회 창업주의 지시에 정유사업 호남정유(현 GS칼텍스)을 제안했다. 사업계획을 만들고 외국 차관까지 들여오며 정부의 사업 허가를 기다렸지만, 정부는 약속된 허가 대신 정유사업자 공모를 냈다. 결국 구평회 명예회장이 미국 칼텍스 사와 합작회사를 세우기로 합의했고 정부의 사업권도 따내며 락희화학은 정유사업과 석유화학사업을 함께 영위하게 됐다.
◆해외 교류·수출 확대하며 글로벌 기업 만든 구두회 명예회장
6형제의 막내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은 1955년 고려대학교 상대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경영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1963년 금성사(현 LG전자) 상무를 시작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까지 필리핀에 전화 교환기를 수출하는 등 수출 확대에 힘썼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한·독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1978년 멕시코 정부로부터 명예영사로 임명됐다. LG그룹 전자계열사에서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치고 1987년부터는 호남정유 사장을 역임했다. 1990년대 중남미 국가와 교류에 힘썼고 1994년 경제교류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멕시코 최고훈장을 수훈한 바 있다. 1996년 한중남미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