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김승호 기자]'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유)옥시레킷벤키저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가운데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유한회사 제도 개선안이 결국 '앙꼬 빠진 찐빵'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옥시레킷벤키저 사명 앞에 붙은 (유)는 '유한회사'의 줄임말이다.
금융위원회가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을 개정해 유한회사도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도록 하고 이를 공시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가 심의 과정에서 '공시 의무 면제'를 권고했고, 결국 금융위가 이를 받아들여 반쪽짜리 개정안을 그다음 절차인 법제처에 심사 요청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16일 금융위 관계자는 "논의가 진행중이지만 규개위의 개선권고사항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당초 안을)수정해 규개위에 다시 제출해 '오케이'를 하면 법제처 심사, 국회 의결 등 나머지 절차를 차례로 밟아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법인의 형식만 다를 뿐 실질은 주식회사와 같으면서도 '회계사각지대'에 있던 유한회사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려던 노력이 정부내에서 제동 걸린 셈이다. 금융위가 외감법을 고쳐 유한회사에게도 주식회사와 동일한 '외부감사+공시의무'를 지도록 하려 한 것은 유한회사들이 그동안 너무 많은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유한회사는 2011년 당시 상법이 개정되면서 자본금(1000만원 이상), 사원수(50인 이하), 지분양도 제한 등이 없어졌다. 사채발행이 불가능한 것 등 일부만 제외하면 주식회사와 차이가 없어졌다.
그런데 유한회사는 외부감사를 받지 않아도 되고, 재무제표 공시 의무도 없다. 회계처리 기준도 알아서 정하면 된다. 회사를 세우기 쉬워진데다 감시망 밖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셈이다. 국내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 상당수와 일부 국내 기업들이 유한회사로 돌아서거나 우후죽순으로 신규 유한회사들이 생긴 것도 이때문이다.
금융위는 2007년부터 2012년 사이 85개 정도의 외감 대상 주식회사가 유한회사로 간판을 바꿔 단 것으로 집계했다.
루이비통 코리아(2012년), 한국피자헛(2007년), 한국마이크로소프트(2006년), 대구텍(2009년), 스태츠칩팩코리아(1999년) 등이 모두 유한회사로 변경한 곳들이다.
금융위와 국세청에 따르면 2010년 말 당시 1만6998개였던 유한회사는 2012년엔 1만9513개로 늘어났고, 2014년 현재 2만5290개까지 증가했다. 4년새 8000개 이상 늘었다.
페브리즈로 잘 알려진 한국P&G, 테팔·로벤타 등 외국계 생활가전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그룹세브코리아, 취업정보 1위인 잡코리아 등도 유한회사다.
이처럼 유한회사가 3만개를 향해 치닫고 있지만 회계 감사를 받지 않다보니 이들 회사가 얼마를 벌어,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다. 특히 유한회사 형태로 국내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이 로열티나 배당금 명목으로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액을 본사로 보내고 있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금융위가 '회계 투명성'과 '형평성' 등을 이유로 관련 법률 개정안을 꺼내들었지만 사실은 이같은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무총리 산하에 있는 규개위는 지난 3월 말 금융위로부터 넘어온 외감법 개정안을 심의·의결하면서 감사는 의무화하되, 감사보고서는 공시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정부 부처는 법률을 개정할 때 규개위의 권고를 그대로 받아 수정안을 다시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규개위 회의록을 살펴보면 회의에 참석한 외국계 유한회사 관계자는 "감사보고서를 공시할 경우 외국 경쟁회사에 원가정보 등 영업비밀이 공개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대기업 등과 거래시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받게 될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사의 해외 계열사가 있는 미국, 일본, 이스라엘 등의 경우 외감은 받지만 그 결과는 공시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날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이 유한회사의 편을 들어준 셈이다.
회의에는 경제분과위원장을 포함해 10명의 민간위원과 국무조정실, 공정거래위원회, 행정자치부, 법제처 등 부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다만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장법률사무소 서동원 상임고문과 안진회계법인에 몸담고 있는 손원익 위원은 기업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참석을 회피, 자리하지 못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권오인 팀장은 "외국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완화한 유한회사 제도가 많은 헛점을 안고 있었던 것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외국기업들은 국내에 진출할 때도 국내 기업에 비해 세제 등에서 혜택이 많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의 유한회사는 회계감사도 받고, 이를 공시하는 완벽한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회계감사만 의무화할 경우 감사를 받는 회사와 회계사간 유착도 우려되고, 이를 공시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적 감시망을 피해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