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파이터'. 전통적인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경제 환경이 달라지면서 그 역할도 금융위기 예방, 고용 등 실물경제 지원으로 확대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통화가치 안정(그 수단은 금리)에 머물고 있다. "한은의 제 1 목표는 물가 안정이 아니라 언제나 경제 안정이었다"는 42년간 '한은맨'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이 새삼 회자 된다. 그러면서도 "정부와 한국은행은 화이부동(和而不同·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최근 기업 구조조정은 물론 경기회복을 위한 한은의 역할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전문가들은 한은의 선제적 참여와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기로에선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본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뿐만 아니라 성장이나 고용에도 통화정책의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한국은행의 역할과 책무도 재정립돼야 한다."(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2014년 4월 1일 서울 남대문로 한은 별관 취임식)
이주열 한은호가 돛을 올려 항해를 한지도 벌써 3돌째다.
요즘 한은은 기업 구조조정의 내홍에 휘말려 바람잘 날이 없다. 정부는 발권력을 동원하라고 압박을 하고 있다. 이주열 총재는 "(양적완화는) 은행 자본확충펀드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가 다시 "자본확충펀드가 한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다"라며 오락가락하고 있다. 한은 스스로 역할을 재정립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선진 중앙은행의 역할은 적극적인 경제 활성화 기조로 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 구조조정이 골든 타임에 이뤄질 수 있도록 중앙은행의 선제적인 지원과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IMF 외환위기 당시 국내 대기업 간 빅딜 사례자료=NH투자증권
◆19년째 한자리 지키는 '물가안정'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한국은행 본점.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게 '물가안정'이라는 현판이다.
한국은행법 제1조 1항이 명시하고 있는 한국은행 설립 목표 역시 물가안정. 금융위기를 겪고난 후 금융안정 기능(2011년)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엄밀히 '고용'과 '성장'은 통화정책에 고려되지 않는다. 물가의 덫에 갇혀 있다는 얘기다.
우리경제는 지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규모가 커졌고, 단단해졌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말한다. 한편에선 일본식 저성장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고, 물가상승률은 지나치게 낮아 로플레이션(lowflation)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많은 전문가들은 변화를 주문한다. 한국은행이 물가안정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경제 활성화나 기업 및 산업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
이주열 총재 취임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경제전문가 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차기 한은 총재의 중점 과제로 10명 중 6명(59.1%)이 '경제 활성화'를 꼽았다. '물가 안정'을 꼽은 비율은 31.8%에 그쳤다. 재계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 역시 한 강연에서 "최근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사명이 많이 바뀌었다"며 "물가를 잡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더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한국은행도 이같은 변화에 공감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국제적인 환경과 국내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만약 중앙은행에 물가안정 외에 다른 역할을 기대한다면, 현재 통화정책 운용체계에서 그 요구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지 점검해봐야 한다. 중앙은행의 바람직한 역할이 정립되고 나면 그에 합당한 수단도 자연히 논의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국은행의 3가지 구조조정 참여 방안 자료=LIG투자증권
◆폐쇄성·소극성 탈피해야
수많은 매니아를 양산했던 '디아블로2'(PC 게임).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롤플레잉 게임의 역사를 다시 쓴 대작이란 평가를 받는다.
경제학측면에서 이 게임은 원시 화폐 경제가 발생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게임의 묘미는 아이템 수집이다. 많은 유저들이 각종 무기나 갑옷 등 희귀 아이템 을 얻기 위해 밤새웠다. 얼마 후 아이템의 가치는 '조단링' 몇 개라는 식으로 가격이 매겨졌고, 기존 아이템의 물물교환도 '조단링'이란 화폐로 대체됐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디아블로2'를 발매했던 '블리자드'사다. 블리자드는 아이템이 나타날 확률을 조절했다. 그러나 조단링의 유통량이 늘어난 이후 온라인 세계에서도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이전에는 조단링 20개 정도면 최고급 아이템을 살 수 있었지만, 너도 나도 조단링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40~50개를 주고도 사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불만이 높아지자 블리자드는 물량 조절(시장개입)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중앙은행도 블리자드사 처럼 시장상황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국내 한 대학의 금융학부 교수는 "한은의 이미지로 부각됐던 폐쇄성과 소극성을 탈피해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다.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여의도연구원이 주최한 '구조조정과 양적완화 세미나'에서 "선제적인 구조조정은 조속한 추진이 핵심"이라면서 "추경 편성 및 국회 심의 등 장시간이 소요되는 재정지출보다는 양적완화가 더 적합하다"고 지적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오승욱 파트너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단순히 기업의 재무상태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업성을 면밀히 분석해 경쟁력이 없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가능성이 보이는 새로운 사업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다"면서 "개별 기업과 정부, 채권단 등 주요 이해 관계자들의 역할이 명확히 정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역할을 너무 확대하면 독립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는 보고서는 "물가 안정을 고려할 때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분명히 바람직하다"면서 "그러나 중앙은행의 임무가 (경기 부양 등으로) 확대되면 정치적 측면 등에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