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은행 자본확충펀드 개요 자료=삼성증권
2008년 12월 11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 한국은행 회의실. 이성태 전 총재는 주재로 본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무려 1% 포인트나 떨어뜨린다.
이날을 기점으로 한은은 금융위기 해결사로 전면에 나선다. 외국 중앙은행들과 함께 이전에 '걸어보지 않은 길'로 들어선 것.
정부와 민간으로부터 "너무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는 공격에 시달렸던 한은은 이후 3%인 기준금리를 2%까지 떨어뜨리고, 총액한도대출을 확대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 같은 움직임은 한국은행법 개정과 공동검사권 부여 등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위기 때 새로운 정책 시도는 각국 중앙은행에 새로운 역할을 요구했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는 기업 구조정과 1200조원대의 가계부채 문제를 푸는 데 한은의 역할과 정책 리더십을 발휘해 주길 기대한다.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더 이상 중립적(부의 재분배 측면에서)이지 않다. 또한 각 국 양적 완화 정책 등으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구분 또한 모호해졌다.
◆정책 공조·리더십 발위할 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통화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과 운용에서의 자유, 즉 운영상의 자유(operational freedom)를 의미할 뿐이다. 통화정책의 목표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중앙은행에 부과되는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앨런 블라인더 교수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두고 한 말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정부와 철저하게 공조하며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까지 써가며 경기부양에 나섰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주요국들도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라는 국익 우선의 정책조합으로 경기 부양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번번이 한 박자씩 늦었다.
독립성을 훼손이라는 비판을 피하려고 정책공조 자체를 애써 외면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선제적이고 독자적인 리더십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적잖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행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이라면 한국은행은 소비자물가지수 목표 달성에만 전념할 게 아니라. 폭넓은 시야를 갖고 잠재적인 경제 위험요인에 대처해야 한다"면서"필요에 따라서는 확실한 정책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의 기본적인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은이 해야할 역할, 필요한 역할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겠다"며 중앙은행의 역할론에 대해 동의한다. 앞서 취임사 를 통해서도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책효과를 높여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를 놓고는 고민이 큰 모양새다.
외환안정기구는 궁극적으로 외환위기 방지의 금융시스템자료=LIG투자증권. 한국은행. 2012년 9월 '한국은행과 신현송의 공동보고서'
한국은행의 수출입은행 출자 (97년) 자료=수출입은행 삼성증권
LIG투자증권 최운선 연구원은 "한은이 거부할 수 없다면,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대한민국 산업의 경쟁력을 지원하는 수준까지 동참할 것을 주문한다"면서 "그 완성은 장기 수주산업에 달러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외환안정기구 설립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외환안정기구의 설립까지 나아갈 경우 이는 국내 회사채 시장의 극심한 양극화를 해소하는 강력한 촉매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킬 것은 지키면서
"만약 미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한다면, 중앙은행은 장기적 관점에서 거시정책을 수행해야 하고 구조개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조적 문제는 세금을 내는 국민의 의견 등을 고려해 의회를 통해 결정할 문제이다."
지난 30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2016년 한국은행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한 제임스 불러드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의 발언이다. 사견을 전제로 했지만, 한은이 국책은행 출자 등의 방식으로 기업구조조정 재원을 대는 것에 독립성 훼손 등을 문제로 부정적인 견해을 밝힌 것이다.
다만 '정책 공조가 독립성 훼손'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나 유럽, 중국의 중앙은행은 국공채를 사들이거나 부실채권 등을 매입해 경기를 부양했다. 미 연준은 2008년 AIG와 제너럴일렉트릭(GE) 등의 구조조정 기업에 직접 구제금융을 지원한 사례도 있다.
우리금융연구원 임일섭 연구원은 "독립된 중앙은행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의 역할과 위상도 변화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경우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위해 정부의 거시 및 금융정책과의 적절한 조합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돈 찍는 공장'으로 전락했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고있는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적잖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한은이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느정도 역할을 한다면 한은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