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인 은행원 이모 씨(51). 그는 아내와 초등학생·중학생 자녀는 미국 시카고에서 생활하고 있다. 9일 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렸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한 것.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국에 유학 중인 가족의 집세와 생활비로 매달 2000달러를 보내던 이 씨는 환율이 하반기 하락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믿고 송금 시기를 미뤄 왔다. 부랴부랴 이날 송금했다. 기준금리가 떨어지면 앞으로 원·달러 환율이 오를 일만 남았다는 판단에서다. 이 씨는 "아이들에게 돌아오라고 할 수도 없어서 한국 쪽 비용을 더 줄여야겠다"며 우울해 했다.
기준금리가 연 1.25%로 사상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한국경제에 미칠 효과와 각각의 상황에 따라 셈법이 복잡해졌다.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 가능성이 커지면서 부담이 커진 '기러기 아빠'들과 해외여행객은 부담이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적인 수요부진으로 고전하고 있는 수출기업은 앞으로 환율이 올라 가격경쟁력이 좋아지지 않을까 내심 반기는 눈치다. 다만 미국이 금리를 올린다면 환율 변동성이 커질 것으로 보여 경영 전략을 짜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전망이다.
이자 생활자와 충분히 금리 수준이 낮다고 판단해 고정금리로 갈아탄 이들은 금리인하에 속앓이 하고 있다. 서민들의 재산 불리기도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은행들의 살림살이도 더 팍팍해질 전망이다. 반면, 대출이 많은 기업과 금융소비자는 금리 인하를 반기고 있다.
◆기러기아빠 울쌍 vs. 수출기업 가격경쟁력 기대
증권사에 다니는 박 모씨(45)는 올여름 '기러기 아빠'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
큰마음 먹고 미주 지역으로 가족여행 겸 아이들 어학연수를 떠날 예정이었다. 지난해 초부터 돈도 모았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로 내려가면서 환율 걱정을 안할 수가 없게 됐다. 조만간 자신이 남을지를 결정해야 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박씨가 여행을 계획한 지난해 초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1070~1080원대였다. 지금은 100원 가까이 오른 상태다.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해외여행객들도 걱정은 마찬가지다. 해외에 나가서 같은 양의 달러를 써도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만큼 원화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직장인 최 모씨(35·서울 마포구 상암동).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여름 휴가를 계획 중이었다. 지금 계획을 짰다가 2달 후에 환율이 오를까 걱정이다. 항공료나 숙박비 등 기본적인 경비야 고정비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현지에서 먹고 마시는 비용과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어서다. 최씨는 "기뻐하는 여자친구를 생각하면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면서 "그 때까지 다른 씀씀이를 줄여서라도 여윳돈을 만들어 놔야 겠다"고 말했다.
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 보다 0.6원 내린 1156.0원에 마감했다. 금리에 대한 우려보다 경기부양 및 부실기업 구조조정 기대감에 무게가 더 실린 덕분이다.
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 미국 금리인상 시점이 6월에서 7월이나 9월로 옮겨갔다는 분석이 많지만, 한·미간 통화정책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예고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린다면 외국인 자금 이탈을 부추겨 환율은 오르고, 주가는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금리 인하가 반가운 이들도 많다.
달러 예금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개인이 가입한 달러 예금은 지난해 말 62억3000만 달러에서 올해 4월 말 68억1000만 달러로 5억8000만 달러 늘었다. 달러 강세에 배팅한 사람들이다. 달러 예금에 돈을 넣은 사람들은 돈을 넣고 뺄때 각각 물어야 하는 환전 수수료를 내고도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수출기업들은 보통 환율이 오르면 세계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좋아져서 매출이 늘어나는 것이 상식이다. 실제 원·달러 환율이 100원 가량 오르면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은 8000억원 안팎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차와 기아차도 각각 연간 1조2000억원, 1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린다면 신흥국 경제가 위축돼 우리나라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특히 잇따른 정책 효과까지 반감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이자 생활자 막막…고정금리 대출자 한숨
기준금리 인하에 이자생활자들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고정금리 대출자들도 울상이다.
조만간 0%대 정기예금까지 등장할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2016년 4월 중 금융기관 가중평균금리'를 보면 예금은행의 저축성 수신금리는 연 1.56%(이하 신규취급액 기준)였다. 은행의 예금금리는 한국은행의 잇따른 금리 인하 여파로 지난해 8월 사상 최저치인 1.51%를 기록한 바 있다
은행권은 또다시 수신금리를 만지작하고 있어 예·적금 금리는 더 떨어질 전망이다.
9일 기준 국민은행의 '국민수퍼정기예금'의 기본금리는 연 1.32%이다. 신한은행의 '신한S드림정기예금'(기본 금리 연 1.3%), KEB하나은행의 '행복투게더정기예금'(연 1.3%), 우리은행의 '위비톡 예금'(연 1.7%), 농협은행의 '채움정기예금'(연 1.41%) 등 대부분 1%대 초반이다.
은퇴 후 은행 예금 이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자생활자들은 더 걱정이다. 1억원을 넣어두면 한달에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채 20만원이 안된다.
서민들의 재산 형성도 막막해졌다. 통장에 넣어봤자 세금을 떼고, 물가 상승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손해 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은행권에선 3%대 1년 만기 적금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반면 대출자들은 더 여유가 생겼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2%대로 내려앉은 상태다. 이번에서 기준금리가 내려가면서 이자 부담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조달금리가 낮아지면서 카드론 금리도 순차적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에 따라 고정금리로 갈아탄 이들은 기준금리가 인하될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부가 가계부채 안정화 대책으로 고정금리대출 확대에 나서면서 시중은행들은 고객들에게 고정금리대출로 갈아타도록 안내했다. 한 국은행에 따르면 4월 현재 가계의 고정금리 대출비중은 31.5%(잔액기준)에 달한다.
은행들은 자칫 역마진까지 걱정해야할 처지다.
하나금융투자 한정태 연구원은 "금리 하락이 지속한다면 순이자마진(NIM)의 추가 하락은 불가피하다"면서 "은행 이익의 85% 이상을 이자이익이 충당하는 상황에서 추가 NIM 하락은 이익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예대마진이 줄어들면 NIM이 하락한다. 가뜩이나 기업 구조조정으로 먹고살기 빠듯한 은행권의 고민도 깊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