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서 레스토랑을 하는 김사랑(가명·49)씨. 그는 외국계 은행이라면 고개부터 흔든다. 몇 해 전 거래하던 외국계 은행이 한국 지점을 폐쇄하면서 겪은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거래하던 주거래 은행이 사라지면서 다른 은행을 찾아 새로 통장을 만들어야 했고, 각종 수수료 등 그동안 쌓아둔 혜택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김씨는 "역시 외국계 은행은 신뢰할 수가 없다. 틈새 거래처로나 제격이다"고 말했다
'골드만삭스인터내셔널은행 서울지점,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 바클레이스 ….' 미국과 유럽계 금융회사들이 우리 곁에서 하나 둘 떠나고 있다. 사회적으로 금융기관은 "과도한" 수익을 창출하면 안 되는 '공익 기업체(public utility)'로 보는 국내 풍토와 태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데다, 저성장ㆍ저금리 기조로 수익성을 중시하는 외국계 금융업체가 버티기 힘들어진 탓이다. 먹거리 줄어드는데 사사건건 간섭하는 금융당국에 대한 불만도 적잖다.
대신 일본계와 중국계 금융사는 자본금, 점포, 직원 등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 "한국 금융당국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20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IFC서울) 지하 쇼핑몰. 이곳은 여의도 증권가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지하 3층 '○○국숫집' 앞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장인 이상현 씨(29)는 "1주일에 두세 번은 들른다. 비즈니스 미팅이나 점심 식사는 물론 영화관까지 있어 저녁 여가까지 보낸다"고 했다.
지상부 오피스동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곳 건물 3동 중 한 동은 불이 꺼진 사무실이 많아 적막할 정도다. 대형 외국계 금융사 유치는 고사하고 빈 사무실을 채우기도 버거운 것으로 전해진다. 또 국제금융센터'라는 이름과 안 어울리게 현재 입주한 회사들 상당수는 비금융회사이다.
영·미계 금융사들이 한국시장에서 짐을 싸고 있다.
국계 투자은행(IB)인 바클레이즈은행과 증권 한국지점, 골드만삭스인터내셔널은행 서울지점, UBS,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 바클레이스, 알리안츠생명 등이 한국 사업을 축소하거나 접었다.
외국계 금융사들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에서의 철수가 그룹의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속내는 좀처럼 수익을 내기 힘들다 보니 우리 금융시장은 외국 금융사들에 '계륵'쯤으로 여겨진다. 실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SC제일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은 올 1분기에 각각 291억원, 36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전년동기 대비 모두 줄었다. 지난해 4분기에는 적자였다.
공익성을 강요하고, 관치가 지배하는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불만도 적잖다. 이런 환경 아래에서는 금융산업이 활력을 가지고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판단이다.
감독과 관련해서 외국 금융사들이 항상 말하는 것은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이다. 하지만 "한국 금융당국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강력한 금융규제는 아시아 국가들 모두의 공통적인 사항이다. 방효진 DBS은행 서울지점장은 올해 'FSS SPEAKS 2016'에서 "국내사와 외국계에 하나의 규정을 적용하기보다는 모국의 규정에도 맞춰 운영하는 기업인 외국계 금융사에 차별화된 규정이 적용됐으면 한다"며 "그것이 금융 경쟁력의 제고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금융당국도 외국계 금융기관들과 소통채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정은보 금융위 부위원장은 20일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외국계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를 열고 "한국시장 철수의 배경에는 외국계 본사의 경영전략 변화, 수익성 전망 악화, 글로벌 금융 규제 강화 등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겠지만, 금융당국 입장에서 한국 금융환경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춰 부족한 면이 없는지 되돌아볼 것"이라고 밝혔다.
정 부위원장은 금융당국의 제도개선이 외국계 금융사의 실질적인 비용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실무 논의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현장점검팀과 로펌, 금융감독원, 전문가로 구성된 '외국계 금융회사 비즈니스 애로해소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깊이 있는 검토를 하겠다고 밝혔다.
◆中ㆍ日은 틈새 시장 확대
영·미계 금융회사가 움츠러든 사이 중국과 일본계 금융회사는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차이나머니는 국내 인수·합병(M&A) 시장 판세를 쥐락펴락하는 '게임 체인저'로 부상한 지 오래다.
지난해 동양생명을 삼킨 중국 안방보험은 불과 1년 만에 알리안츠생명 한국법인마저 손에 넣었다. ING생명, PCA생명 등 다른 국내 보험사 인수전에도 중국계 보험사와 재무적투자자(FI)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중 매각가가 2조~3조원대로 예상되는 ING생명은 중국계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현재 ING생명 매각 협상에 나서거나 실사에 착수한 곳은 홍콩계 사모펀드인 JD캐피털, 중국계 전략적 투자자인 푸싱그룹과 태평생명 등 모두 중국 자본으로 알려졌다.
최근엔 보험뿐 아니라 증권 등 다른 금융업까지 전방위로 입질 범위를 넓히고 있다
2014년 동양증권을 손에 넣은 곳도 중화권인 대만 유안타증권이다.
민영화를 추진 중인 우리은행도 안방보험 등 중국계 자금들이 입방에 오르 내린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난 "한국 금융 시장이 중국 경제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 인수합병의 경우에는 먹튀와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계 금융자본은 한국의 대표 서민금융 업종인 대부업과 저축은행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 있다.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등 29개 일본계 대부업체의 지난해 9월말 기준 총 대부잔액은 6조5000억원으로 토종업체를 합친 업계 합산액(119개 업체·10조9623억원)의 무려 59%를 차지한다. 일본계 자본이 한국 서민금융 시장에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업체에 비해 자금조달 여건이 유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