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의 일이다. 서울 모 사립대 철학과 강의에서 교수가 '일베충'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을 비판했다. 일베충은 일베 이용자를 벌레(蟲)에 빗대 비하하는 표현이다.
교수의 일베충 발언에 당시 학부생이던 기자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수의 입에서 나온 표현이기 때문이다. 수업 이후 해당 교수에게 도를 넘은 혐오성 용어는 빠르게 확장돼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한 기억이 있다.
2016년 여름, 당시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는 생각을 한다. 일베충으로 시작된 비하는 학생(급식충), 직장인(출근충), 노인(틀딱충)으로 점차 확장됐다. 최근에는 '한남충(한국 남성)'이라는 표현까지 생겨났다. "한남충 재기해(한국 남자들 자살해)"라는 악에 받친 외침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러한 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비난의 대상은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벌레라는 기표를 씌우면 죄의식은 옅어진다. 혐오성 발언을 내뱉는 이들은 모두 같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말 사람을 상대로는 못 하지. 하지만 저건 사람이 아닌걸! 그러니 괜찮아." 언어로 인해 일종의 면죄부가 생긴 것이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인권을 전제로 성립한다. 신의 권능을 위임받은 절대자가 아닌 만인의 통치가 이뤄지고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해 대표자를 뽑는 대의제가 시행되는 것은 인간이 동등한 수준의 인성과 지성을 지녔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임의로 타인의 인권을 박탈해 '벌레'로 만들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있을까. 인간은 동등한 인권을 지녔다는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평등은 사라진다. 계급을 바탕으로 한 절대자의 통치 역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혐오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상대를 나와 동일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 존중을 바탕으로 토론을 거듭하는 것은 혐오와 경멸보다는 어려운 방법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틔워내는 민주주의라는 꽃의 아름다움은 87년 더운 여름, 우리 모두가 목격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