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학원이 공부를 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세성 기자
박모씨(남, 23)는 이번 명절 고향에 가는 대신 공무원 학원의 자습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연휴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도권에 위치한 4년제 인문계 대학을 휴학하고 지난 7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박씨에게 명절은 피하고 싶은 날이다. 그는 "고향에 가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취직이 잘 된 사촌과 비교를 당한다"며 "친척들이 '취직은 언제 할거냐', '그 학벌에 좋은 곳에 갈 수는 있냐'는 질문만 하며 모욕감을 주는데 굳이 힘들게 가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명절에 모인 친척들의 자식자랑은 2030세대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 지 오래다. 이번 추석도 다르지 않았다. 추석 연휴 동안 고향인 부산을 다녀온 조모씨(여, 28)는 다음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을 계획이다.
조씨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성적으로, 대학생일 때는 학교 인지도로 친척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졸업도 잘 하고 취직도 해서 이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이제는 '회사 연봉이 얼마냐', '결혼은 언제 할꺼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는 질문 공세를 받았다"며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니 좋은 이야기만 하기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굳이 저런 질문으로 힘들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청년층 사이에서는 '자식몬 배틀'이라는 표현이 생겼다. 이 표현은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서 유래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포켓몬스터를 내세워 '포켓몬 배틀'이라는 싸움을 한다. 자식몬 배틀은 포켓몬 배틀에 빗대 부모들이 자식을 내세워 싸움을 한다는 의미다.
자식몬 배틀 과정에서는 고향을 찾은 사촌형제들을 학력, 직장, 연봉 등으로 평가한다. 평가 과정에서 간접과 지적도 이어진다. 숙박 O2O업체 여기어때가 이달 초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710명 가운데 47.18%인 335명이 추석을 앞두고 가장 큰 명절 스트레스로 가족·친지의 간섭을 꼽은 바 있다.
본지와 숙박 O2O 여기어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35%의 응답자가 학업·직업과 연애 등에 관해 친지들로부터 감정이 상하는 말을 들었다고 응답했다. /여기어때
본지와 여기어때가 추석 연휴 기간인 13일부터 17일까지 전국 2030세대 7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청년의 42%는 추석에 고향을 찾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향에 가지 않은 이유로는 '공부 등 할 일이 있다'는 응답이 25%였고 '친지와의 간섭·갈등을 피하기 위해서'가 18%,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서'가 15%였다.
추석을 친척과 보낸 이들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들 가운데 35%는 추석에 친지로부터 감정이 상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응답했다. 감정이 상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학업 또는 직업에 관한 평가와 간섭이 3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연애·결혼에 대한 평가와 간섭이 28%로 뒤를 이었고 외모에 대한 지적을 받은 경우도 10%에 달했다.
그렇다면 어떤 말들이 청년들에게 힘이 되었을까. 응답자들은 ▲학업·직업 ▲외모 ▲연애·결혼에 관한 친척들의 격려와 칭찬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