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경제의 유례 없는 저성장·저금리 기조가 가계 금융자산 비중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보험과 연금 자산은 전체 가계 금융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한 반면 현금과 예금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저금리 기조에 따른 은행 예금 수익률 저하는 물론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보험과 연금 자산은 989조1490억원이다. 전체 금융자산(3176조1350억원)의 31.1%를 차지한다.
전체 가계의 금융자산에서 보험과 연금 자산은 지난 2008년 419조2390억원(24.6%), 2011년 610조1770억원(26.1%), 2013년 803조530억원(30.2%)으로 비중이 30%를 넘어서는 등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한은은 "고령화 진전에 따라 연금이나 보험을 통해 노후에 대비하려는 가계의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전했다.
◆ 은퇴 후 자영업자로 변신…보험·연금자산 까먹어
반면 저금리 기조로 인해 은행 예금 금리는 꾸준히 떨어지면서 전체 금융자산에서 현금과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실제 지난 2008년 현금통화와 예금 규모는 832조5950억원(48.9%)으로, 전체 금융자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했지만 지난해엔 1368조700억원(43.1%)으로 5%포인트 가까이 감소했다.
한은은 "현금과 예금자산 비중은 지난 2014년 말 1261조2890억원에서 지난해 말 1368조700억원으로 늘었지만 전체 비중은 43.5%에서 43.1%로 일년 만에 0.4%포인트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베이비붐 세대와 고령자들이 은퇴 후 생계형 자영업을 시작해 보험과 연금 자산을 쉽게 까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경제활동이 활발했던 3040대와 달리 노후에는 은퇴 후 매달 꾸준한 수입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경험이 없는 은퇴자들이 무턱대고 자영업에 뛰어 들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이는 노후 파산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소기업청이 지난 2000년부터 12년간 소상공인 생존율을 조사한 결과 자영업자들의 3년 생존율은 53.9%에 불과했다. 자영업 준비를 위해 전체 자산에서 빚이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시기도 은퇴 전후인 50대인 것으로 집계됐다. 20~30%에 불과한 자영업 성공률이 가계 빈곤을 부채질하고, 또 노후파산으로 몰고가는 등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허문종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 자영업은 도소매업이나 음식·숙박업 등 전통 서비스업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어 과잉경쟁이 불가피하다"며 은퇴자들의 자영업은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60대 이상' 노후 준비 부족
이 같은 한국경제의 저성장·저금리 기조에 따른 전통적인 금융자산 비중의 변화와 은퇴 후 마땅한 일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현실 앞에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와 노년층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경제활동 만으론 노후 대비에 한계가 있어 정부가 은퇴자들을 위한 일자리 마련 등 노인 복지정책의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조사한 경제행복지수 조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민들의 경제행복지수는 38.9점(100점 만점)에 그쳤다. 유럽 재정위기 여파가 심했던 지난 2011년 하반기(37.8점) 이후 최저치다. 특히 경제적 행복감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는 일자리 문제나 주택 문제를 제치고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이 꼽힌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경제적 행복의 가장 큰 장애물을 묶는 질문에 '노후 준비 부족'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34.1%로 가장 많았다"며 "경제활동기 빚을 갚고 자녀 교육비를 대느라 노후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채 은퇴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경제 여건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전했다.
연 1%대 초저금리로 인해 예금 이자로 생활하는 게 어려워진 현 경제상황에 연금제도의 미성숙과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으로 60대 이상의 경제 불안은 가장 심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고령화율이 점점 높아지는 데다 노인 고용의 불안정성,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시기 등이 겹치면서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는 특히 오는 2020년부터 수명 연장에 따른 고령화가 일본, 독일 등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척될 것으로 예상돼 정부가 나서 공적 연금개혁이나 의료보험 재설계, 노인 일자리 마련 등 특단의 대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