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을 꺾고 세계를 놀라게 한 알파고를 만든 곳은 벤처기업 '딥마인드'. 놀라운 것은 구글이 딥마인드를 인수하는데 4억 달러 가량을 쏟아부은 점이다. 설립된 지 4년도 안 됐고 별다른 매출이나 이익을 창출했을 리 만무한 직원 50여명짜리 회사를 인수하는데 그 엄청난 금액을 지불한 것. 구글(현재의 알파벳)의 시가총액 550조를 수십, 수백 배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벤처생태계는 어떨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갈 길이 멀어 보인다'는 점이다.
정부나 기업 모두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성장을 이끌 잠재력은 벤처에서 나온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인 '마중물(모태펀드)' 마저 제때 공급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창업과 성장, 회수, 재도전 등 선순환 벤처 생태계를 만들 마중물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모태펀드의 신규 자펀드 현황자료=자본시장연구원, 한국벤처투자
◆ 올해 신규출자 1042억원
"'알파고'를 개발한 벤처기업 딥마인드와 구글의 사례가 국내에서도 창출·확산될 수 있도록 신기술·신산업 시장 창출을 지원하고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인수·합병(M&A)이 활성화되도록 하겠다."
"(정부가 벤처캐피털에 출자하는)모태펀드는 최소한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고 엔젤투자, 크라우드 펀딩 등 모험자본을 확대해 자본생태계의 자생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최상목 기획재정부 제1차관 한국벤처창업학회 춘계학술대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올해 들어 마중물이 확 줄었다.
21일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6월 말까지 모태펀드의 자펀드는 총 455개, 출자금액은 3조6916억원이었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에 새로 만들어진 자펀드는 15개에 불과하다. 신규 출자금액도 1042억원에 불과하다. 정부의 재정 여력 약화 등으로 올해 모태펀드 예산(1010억원)이 지난해 대비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것 등이 영향을 준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추세라면 2011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일 전망이다. 모태펀드의 자펀드는 2012년 30개(2561억원), 2013년 57개(5994억원), 2014년 50개(4891억원)로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해에는 76개의 자펀드가 만들어졌고, 신규 출자금액은 6489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창조경제 활성화에 적극 나서면서 벤처투자로 유입된 정책 자금이 늘어난 덕분이다.
펀드 운영비중도 구조조정(CRC, M&A, 세컨더리)이 30%에 달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중점지원(창업, 지방, 여성)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중소 협력업체를 포함한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많이 늘어난 탓이다.
유형별 펀드운용비중 자료=자본시장연구원, 한국벤처투자
◆ 한국경제 더 많은 '스타 벤처'가 나오려면
"스타트업 기업(Start-Up, 갓 창업한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엔젤투자자를 찾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다. 설령 투자받아도 경영간섭이나 기업공개(IPO) 압박에 시달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스타벤처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다."
창업 초기 해외 엔젤투자자에게 투자받아 회사를 키운 A사 최고경영자(CEO)의 말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벤처 투자는 개인투자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중장기적 투자보다는 눈앞의 수익에 급급했다. 흔히 말하는 '묻지마 투자'도 빈번했다. 이 같은 투자 관행을 바꾸기 위해 태어난 것이 모태펀드(2005년)다.
덕분에 적잖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A사와 같은 고민을 덜 수 있었다.
'스타 벤처'도 나왔다. 다음카카오, YG엔터테인먼트 등이 꼽힌다. 모태펀드의 자펀드들은 이들 기업의 성장 가능성에 수십억을 투자했다. 몇년 만에 결국 수백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회수했다.
자펀드로부터 43억원을 투자받은 '국민 내비게이션' 김기사(록앤올)는 지난해 다음카카오에 626억원에 팔렸다.
"가상 증강 현실은 아직 초기 단계인 만큼 정부는 부족한 핵심원천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벤처기업들은 창의적 상상력으로 무장해 다양한 킬러콘텐츠를 개발한다면 글로벌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새 시장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청와대에서 주재한 제2차 과학기술전략회의에서 한 말이다. 알파고나 포켓몬고와 같은 핵심 기술과 벤처가 없는 데 대한 답답함의 토로였다.
기업들과 전문가들은 모태펀드가 더 많은 스타트업 기업에게 마중물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
벤처기업 한 관계자는 "모태펀드 투자를 통해 기업의 신뢰성이 높아지면 벤처캐피털(VC)의 후속 투자도 쉬워진다. 더욱 적극적인 지원이 아쉽다"고 전했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술만 있다고 창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경험이 부족한 청년 창업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마케팅이다. 이런 부분에서 도움을 주는 세밀한 정책이 가미돼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6월 말 기준 모태펀드가 자펀드 청산을 통해 회수한 금액은 1조3675억원이다. 올해 들어서만 1902억원이 회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