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매출 4500억원대로 국내 회계 시장을 휩쓸던 삼일회계법인. 하지만 삼일은 지난해 9월과 11월 두 차례 연달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삼일은 지난해 9월 대우건설 부실감사 의혹을 받더니 2개월 뒤인 11월에는 소속 회계사들의 부정으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서울남부지검은 회계사들이 피감 회사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한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해당 수사로 삼일 소속 회계사 26명이 적발됐고, 이 중 2명은 구속됐다.
불명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최고 경영자인 안경태 회장은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현 유수홀딩스 회장)에게 한진해운 자율협약 신청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는 구설수에 휩싸였다.
회계업계의 맏형 삼일회계법인의 새 CEO(최고경영자)로 선출된 김영식 부회장이 그려나갈 미래가 궁금한 이유다.
사내 안팎에서는 무너진 신뢰와 회계사의 생명인 도덕성을 회복하는 게 가장 큰 관건이라고 말한다. 장기적으로는 회계감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는 것도 김 부회장이 풀어나갈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삼일회계, 12월 김영식호 항해 시작
삼일회계법인은 4일 사원총회를 열어 김영식 부회장을 새 CEO(최고경영자)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2003년 삼일회계법인 CEO를 맡아온 안경태 회장의 임기는 내년 6월까지지만 조기에 물러나게 됐다.
안 회장은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에게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 관련 정보를 알려줘 보유 주식을 매각하도록 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사퇴설이 나돌았다.
김 부회장은 인천 제물포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1978년 삼일PwC에 입사했다. 지난 2014년 부회장직에 오르면서 차기 총괄 대표 유력 후보로 꼽혔다. 삼성그룹 등 주요 대기업의 외부감사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삼일PwC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2004년 회계 선진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김 부회장은 두 달 가량의 업무 인수인계 기간을 거쳐 오는 12월 1일부터 CEO 업무를 시작한다.
◆내부통제 강화, 신뢰·도덕성 회복 선결 과제
김 부회장의 어깨는 삼일회계법인 역사상 어느 CEO보다 무겁다.
삼일회계법인이 불미스러운 뉴스의 단골손님으로 낙인찍혀 있기 때문이다. 갓 입문한 경력 5년 차 미만 주니어 회계사들이 미공개정보로 주식 투자를 하다 검찰에 적발돼 물의를 일으키는가 하면, 수장인 안 회장은 미공개정보를 흘렸다는 구설에 휘말려 삼일이 자본시장의 '파수꾼'이 아닌 '협잡꾼'으로 전략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받은 것.
이 같은 현실은 삼일 만의 문제도 아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2016년 국제경쟁력 평가 세부 항목에서 '회계 및 감사의 적절성'은 조사 대상 61개국 중 61위였다. 2014년 59위에서 지난해 60위로 내려간 뒤 이번에 또 한 계단 하락한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국, 몽골, 베네수엘라 등 개발도상국들도 모두 한국보다 순위가 높았다.
시장 안팎에서는 김 부회장이 강도 높은 체질 개선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삼일이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에게 자율협약 신청 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에서 나타나듯 회계법인과 기업간 유착관계가 만연해 고질적인 부실회계가 되풀이되고 있다"면서 "김 부회장 취임 초기에 내부통제를 강화해 이미지를 바꾸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맏형격인 '삼일'이 나서 회계업계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회계시장은 계약과 보수 등을 사적영역에 맡긴 자유수임제 아래 회계법인의 저가 회계 수주 여파로 기업과 회계법인간 '갑을(甲乙)' 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착관계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오히려 공공성을 가지는 회계법인이 '을(乙)'의 위치여서 '갑(甲)'인 기업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립적인 감사를 실시하기 쉽지 않은 구조이다.
손성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감사보수 하락 문제는 시장에서 뛰고 있는 회계법인들이 직접 풀어야 하는 사안이다"며 "업계를 대표하는 한국공인회계사회나 대형 회계법인이 중심을 잡아주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도 "뒤틀린 갑을관계 등 오랜 악습을 확 뜯어고치고, 회계감사 공공 수수료율표 부활 등 정부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장기적으로 '새 먹거리'를 찾고, 회계사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도 과제다. 이를 통해 고질적인 병폐와 성장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5 회계연도에 4대 회계법인의 총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조2631억원과 222억원으로 전년보다 매출은 5.7%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11.2% 줄었다.
정용원 금감원 회계심사국장은 "대형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들이 인사적체에 따른 승진 기회 감소, 업무량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 등으로 인해 퇴사 후 독립해서 중소 회계법인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