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상품 가격이 전반적인 물가상승률 둔화를 이끌고 있다. 세계 무역량 증가세 둔화가 몇몇 선진국에는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IMF 9월 27일(현지시간) )
세계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짓눌린 지 오래다. 세계 각국이 26년간 장기불황 속에 빠진 일본을 닮아간다는 의미에서 '일본화(Japanization)'란 말까지 등장했다.
실제 아베노믹스의 일본은 지난 2·4분기 성장률이 0.2%에 그쳤다. 유럽은 이미 성장률 0%대로 신음하고 있다. 중국마저 공장 출고가(생산자물가)가 54개월째 떨어지는 심상찮은 조짐을 보인다. 특히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론'이 중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경제, '일본화(Japanization)'하나
일본은 양적·질적 금융완화(QQ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Monetary Easing)정책을 강화할 태세다.
일본의 8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0.5% 하락했다. 하락 폭은 전달(-0.5%)과 같았지만, 2011년 3월 -0.7% 이후 가장 큰 낙폭이 이어졌다. 8월 실업률도 3.1%로 전달보다 0.1%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시장 예상치(3.0%)보다는 높았지만, 여전히 1995년 5월 3.0% 이후 21년 만에 최저수준을 유지했다. 일본경제(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양적완화에서 금리 정책으로 전환했지만 물가상승률 2% 달성의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며 "단기 결전을 노렸던 구로다(일본은행 총재)가 지구전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급기야 일본은행(BOJ)은 지난 20일부터 21일까지 열린 통화정책회의 종료 직후 추가적인 금융완화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장단기 금리조정 정책을 통해 장단기 국채 수익률 곡선을 관리하고 2% 물가상승률 달성을 위해 본원통화를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유럽중앙은행도 디플레이션과의 전쟁에 나섰다.
EU 공식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유로존의 9월 소비자 물가는 0.4% 올라, 지난 8월의 0.2% 인상보다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 같은 물가상승률은 지난 2014년 10월 이후 최고다.
이에 따라 그동안 유럽중앙은행(ECB)이 디플레이션 직전에 빠진 유로존의 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진해온 저금리정책 등 경기부양 프로그램이 세력을 얻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는 EU의 중장기 목표치(2%)에는 여전히 크게 미달하는 것이다.
무디스는 중국의 성장률은 작년 6.9%에서 올해 더욱 둔화해 6.3%에 그칠 것이라며 중국의 경기 둔화를 올해 세계 경제의 가장 큰 위험으로 꼽았다.
무디스는 보고서에서 "중국은 부채에 기반해 성장률 목표치를 달성하고 있지만 무리한 목표치 달성을 위해 자원배분을 잘못한다면 성장의 질을 희생시키고, 정부가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 불균형을 바로잡는데 어려움을 가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각국이 디플레이션에 민감해하는 이유는 뭘까.
디플레이션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했듯, 만성적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은 국민 삶을 피폐하게 한다. 물가가 오르면 서민들 구매력이 떨어져 경제 불평등이 더 심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 불황 속에서 디플레이션은 위험하다. 저물가가 고착화되면 수요 침체와 생산, 고용 위축으로 경제가 저성장의 질곡에 빠질 수밖에 없어서다.
◆韓, 고도 성장의 추억에서 벗어나야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IMF는 세계 무역량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는 데 대해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의 전조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2008~2012년 수입품 가격이 물가상승에 기여해왔지만 2012년 이후 유가 하락 등으로 그 역할이 약해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른 디스인플레이션 현상도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수입품 가격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역량 증가 속도가 둔화된 탓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1985~2007년 세계 무역은 경제 성장률의 두 배 속도로 확대됐으나 최근 4년(2012~2015년) 사이에는 무역량 증가 속도가 오히려 세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보다 낮아졌다. IMF는 "이 같은 현상은 과거 50년간 거의 없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IMF는 "보호무역주의와 반(反)세계화의 확산이 세계 무역 증가를 방해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디플레이션' 우려도 걱정이다. ADB는 중국 경제가 올해 6.6%에서 내년 6.4%로, IMF는 올해 6.6%에서 내년 6.2%로 둔화될 것으로 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권이자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바꿔가며 세계 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하던 중국 경제의 하락세는 전 세계의 경기둔화로 파급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12월에 금리를 올린다면 중국 경기둔화에 따른 후폭풍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중국이 자본유출 가속화를 막기 위해 위안화 평가절하에 기대 수출을 늘리려 할 것이고 이에 맞서 세계 각국이 통화전쟁에 나설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와 한국은행은 과거 고도성장 시대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률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수준은 아니지만 안심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손을 쓰기 어렵다. 일본은 1992∼1993년 연속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를 보였는데도 대응을 머뭇거리다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경제연구실장은 "현재의 장기불황 국면에서 조속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수의 추가 침체를 방어하면서 수출에서 경기회복의 계기를 모색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