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지난 14일(현지시각) 올해 환율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한국을 다시 '관찰대상국 (Monitoring List)'으로 남겨뒀다. 2차 경고다. 직·간접적인 무역제재를 받을 수 있는 이른바 '환율조작국(심층분석대상국)' 지정은 피했지만, 미국은 "금융시장이 무질서한 환경에 처할 때만" 시장 개입을 제한하도록 압박해 우리 외환당국의 정책 대응에 상당한 부담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가뜩이나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수출 부진으로 힘에 부치는 한국 경제에 "외환운용의 투명성을 더 높여라"는 미국의 압박이 겹치면서 부담은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달러 대 교역 상대국 통화자료=미국 재무부, FRB and Haver Analytics
◆"한국 대미 무역 흑자 과다"
미국 재무부는 의회에 제출한 '주요 교역 상대국의 환율 정책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해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당하고 대미(對美) 무역흑자 폭이 크다"며 한국 환율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최근 1년간(2015년 7월~6월) 7.9% 증가한 게 환율을 인위적으로 손을댄 데 따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직전 1년 7.0%보다 증가한 것이다. 특히 전체 흑자액은 210억 달러에 불과한데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300억 달러에 달하는 등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돈을 벌어가는 것도 언급했다. 원화 가치를 낮추는 방식으로 한국산 제품의 수출 가격경쟁력을 높였다는 의심을 밑바탕에 둔 분석이다.
미국은 객관적 근거로 국제통화기금(IMF)보고서를 들었다. 보고서는 "올들어 지난달까지 원화 가치는 미국 달러화에 대해 6.5% 상승했다"며 국제통화기금(IMF)의 올해 보고서를 인용해 실질실효환율 기준 원화 가치가 경제 기초여건에 따른 적정 수준보다 4∼12% 낮은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환율조작국 지정 요건은 대미 무역 흑자가 미 국내총생산(GDP)의 0.1%에 해당하는 200억달러를 넘어서고,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3%를 넘어서며, 외환시장 개입을 목적으로 GDP 2%를 넘어서는 외화를 사들였을 때다. 지난 4월 미 재무부는 한국, 중국, 일본, 독일은 첫번째와 두번째 요건에 해당되며, 대만은 두번째와 세번째 요건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여기에 스위스가 새로 관찰대상국에 포함됐다.
◆환율정책 족쇄 보호무역 강화하는 美
이번 보고서는 최근 팽배한 미국 보호무역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환율 정책 보고서는 미국 환율정책의 '슈퍼 301조'로 평가되는 '베닛·해치·카퍼(Bennet·Hatch·Carper·BHC)법'이 올해 2월부터 발효된 데 근거한 것이다. 핵심 취지는 통화가치를 끌어내리는 환율개입(인위적 환율인상)을 수출 보조금을 준 것으로 보고 보복하겠다는 얘기다.
지금껏 미국은 슈퍼 301조(포괄무역경쟁력법) 등을 동원해 세계 각국을 상대로 불공정 무역을 압박했다.
미국 재무부는 "한국 당국이 외환시장 개입 활동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도록 권장하는 것은 물론, 건전한 재정정책 수단의 사용을 포함한 내수 진작 수단을 추가로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의 최근 대미 경상수지 흑자가 유가하락 등에 따른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라는 점에서 연이은 '관찰대상국' 지정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질서 속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 특정 국가의 환율정책에 족쇄를 채우려는 의도라고 지적한다.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은 외교전문잡지 '포린어페어(Foreign Affairs)' 4월호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톤으로 여섯 차례나 일부 국가의 약탈적 절하를 경고했다. 지난 6월에도 "(개별 국가의) 일방적인 환율 개입은 금융시장을 불안정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미국은 힐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대권 경쟁이 한창이다. 막대한 대미 흑자를 내는 나라들이 불공정한 환율정책을 편다는 의심이 공공연히 제기된다. 두 주자의 공약은 극과 극이지만, 대외무역·외환정책을 보면 기존 버락 오바마 정부에 비해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할 조짐은 뚜렷하다.
힐러리는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우리가 불공정 무역협정에 단호히 '노(NO)'라고 말해야 한다" 했다. 트럼프는 한국을 '경제 괴물'로 지칭하고 "중국이 (미국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991년부터 9월 말까지 한국에 시행된 각국의 수입규제는 179건이나 됐다. 이 가운데 131건은 이미 규제에 들어갔고 48건은 규제를 위한 조사를 하고 있다. 수입규제의 근거로는 반덤핑이 127건으로 가장 많았고, 세이프가드 45건, 상계관세 7건 등의 순이었다.
환율조작국 지정 이후대미 무역수지가 적자로 반전자료=LG경제연구원
◆"국내 소비와 투자 등 내수 경제 키워야"
시장에서는 관찰 대상국 지정이 가뜩이나 좋지 않은 한국 경제에 더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근 스마트폰, 자동차, 조선업 등의 영향으로 수출이 극도로 부진한 상황에서 "대미 무역흑자가 지나치다"는 2번째 경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품 수출을 인위적으로 줄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정부로서는 원·달러 환율 하락 압력이 들어올 때 사실상 손을 놓고 방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됐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9월 수출액이 409억달러로 지난해 같은달보다 5.9% 줄었다. 지난 8월 수출액이 2014년 12월 이후 20개월 만에 증가세로 돌아선지 한달만에 다시 뒷걸음 한 것이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5월 '강경해진 미국의 환율정책, 원화도 절상위험 커진다'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원·달러 환율의 대폭 하락이 현실화될 경우 수출 부진이 심화하고 장기화하면서 우리 경제가 상당한 어려움에 부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미국의 원화절상 압력에 대응하는 노력이 요구된다며 "우리 경제가 처한 대외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국내 소비와 투자 등 내수 경제를 키워나가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처방"이라고 주장했다.
무역협회는 "세계 경제 회복 지연, 일부 산업의 공급과잉과 함께 미국 대선이 맞물리면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며 "기업들은 미국발 수입규제의 조사 절차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미국당국의 조사를 받으면 최대한 자료 요청에 협조해야 과도한 판정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