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돈화문로의 한 귀금속도매상가에 고객들이 금상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의 한 귀금속도매상가.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고객 10여명이 이곳저곳에서 금제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모씨(48·여·서울 서초구)는 "금값이 오를거란 소식에 지인들과 궁금해서 들렸다"며 "주식에 투자해 봤지만 오른 종목만 오르더라. 그래도 금은 언젠가 오르니 금반지 몇 개 구입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3.75g(1돈)짜리 순금 반지 값은 현재 18만~19만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30만원까지 치솟던 때(2011년 9월)에 비해면 아직 싼 편이다. 귀금속 가게를 운영하는 이모씨(46)는 "금 시세를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을 결혼시즌을 맞아 실수요 뿐만 아니라 투자 수요도 부쩍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미국을 부강한 국가로 재건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해야 한다"며 강한 미국을 외치는 트럼프. 이른바 미국 재건에 힘을 싣는 '트럼프노믹스'가 생활 풍속과 재테크, 자산 포트폴리오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아래 미국 기업들을 살려 약 달러 노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역협정 철회나 재협상, 중국의 환율조작국 지목 등의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은 투자자들의 발길을 안전자산으로 돌릴 전망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여력이 커지면서 서민들의 자산불리기는 더 팍팍해질 전망이다.
◆트럼프가 몰고 온 '골드테크'
금(Gold)값이 오르고 있다. 현재 서울 종로 귀금속 상가의 금 시세는 순금 한 돈(3.75g)이 19만원대로 부가가치세와 세공비를 합쳐 최소 22~23만원은 줘야 한 돈짜리 금반지를 손에 낄수 있다.
트럼프 리스크와 저금리 영향으로 투자자의 발길이 안전자산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금값 약세의 주범으로 꼽히는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도 늦춰질 것으로 전망돼 투자자들의 관심은 더 커졌다.
9일(현지시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국제 금 가격은 전날보다 온스당 1달러 하락한 1273.50달러를 기록했다. 금값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이 확정된 직후 5% 이상 급등하며 1338.30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최대 상승 폭이었다
지난 2011년 역사적 고점에 도달했던 금 가격은 2015년 하반기 온스당 1100달러 이하에서 저점을 형성했다가 현재 1300달러를 웃돌고 있다.
같은 날 런던 소재 금거래업체 샤프스픽슬리는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수요가 급증해 금 재고가 소진됐다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 지난 9일 한국거래소(KRX) 금시장에서 금 1g은 전날보다 1940원(4.13%) 오른 4만8930원에 거래를 마쳤다. 가격 상승폭(종가 기준)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결과가 나온 지난 6월 24일(2370원) 이후 최대 수준이다.
귀금속도매상가가 몰려 있는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6나길을 주변 상인과 고객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
서울 명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황 모씨(56)는 만기 3년 짜리 정기예금을 다시 예치하기 위해 최근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고금리 상품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금리로는 사실상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이빗뱅커(PB)권유로 1㎏짜리 금괴(골드바) 2개를 구입했다. 그는 "미국도 그렇고, 정세가 불안할 땐 금만한 안전자산이 없다. 당분간 다른 자산도 처분해 현금이나 안전자산에 묻어 둘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턱 대고 투자했다가는 낭패다. 골드바 등 금 실물을 구매할 때는 부가가치세(10%) 등 15% 정도의 추가 비용이 든다.
시중은행 한 PB는 "골드바 문의가 부쩍 늘었다. 그러나 섣불리 투자하기 보다는 시장 상황을 꼼꼼히 챙겨보고 투자하는 것도 늦지 않다"고 조언한다.
◆기러기 아빠 안도, 달러베팅 투자자 호호~
'기러기 아빠'인 은행원 박 모씨(53). 그는 아내와 초등학생·중학생 자녀는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8일까지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기 때문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극단적 루머까지 나와서다. 일단 대선 결과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미국 금리 인상(달러 강세 요인)에 반대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이변을 연출했다. 박 씨는 "단기적으로는 원화값이 약세지만 환율이 하락(원화가치 상승)할 것 같다. 일단 안심이다. 송금을 서둘지 않길 잘했다"고 웃음 지었다.
트럼프가 미국 백악관의 주인이 되면서 원·달러 환율이 요동치고 있다. 전날에 이어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1원 오른 1150.6원에 마감했다.
유학생 자녀를 둔 기러기 아빠나 외국환 투자자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당장 '기러기 아빠'들과 해외여행객은 부담이 늘었다. 안전자산 선호가 강해지면서 달러값이 올라서다.
겨울 휴가를 준비하고 있던 해외여행객들에겐 날벼락이다. 여행에서 씀씀이가 줄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인 김 모씨(32·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괌으로 겨울 휴가를 계획 중이었다. 당장 11월 25일이 출발일인데 원화 값이 더 떨어질까 걱정이다. 항공료나 숙박비 등 기본적인 경비야 고정비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현지에서 먹고 마시는 비용과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자영업자 박 모씨(37)는 느긋하다. 내년 여름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가족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원화값이 강세를 보일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다.
LG경제연구원 이창선 수석연구위원은 "원화 환율의 경우 당장 위험자산 기피와 12월 중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으로 원화가 약세를 보인다"며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강화가 원화절상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서민들의 자산 불리기는 더 팍팍해질 것으로 보인다.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2월에 섣불리 금리를 올릴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스스로 '저금리 인간(low interest rate person)'이라고 할 정도로 금리 인상에 반대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를 한 차례 인하할 여력이 커진 셈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기준금리 인하 여력에 대해 "대응 여력은 남아있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9월 시중은행의 저축성 수신금리 역시 1.35%다.정기예금 금리는 1.33%다. 특히 은행권 정기예금 가운데 금리가 2.0% 이상인 상품은 사상 처음으로 0%로 집계됐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가 또 내린다면 서민들은 통장에 넣어봤자 세금을 떼고,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손해 보는 장사를 해야 한다.
반면 달러에 베팅했던 큰 손들은 트럼프의 승리가 반갑기만 하다. 단기지만 안전자산 선호로 달러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한 PB는 "달러를 사뒀다면 올해 안에 분할 처분하고, 현금 여력이 있다면 엔화를 사 두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장기적으로는 달러 약세, 엔강세가 예상돼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주식과 회사채가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안전자산으로 인지되는 금과 일본 엔으로 투자가 집중될 것"이라며 "미국 국채는 수혜 가능성이 있으나 트럼프 정책으로 재정 적자 규모가 커지면 장기채가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