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징크스'가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손학규 징크스'는 손 전 대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면 북한 첫 핵실험ㆍ연평도 포격ㆍ저축은행 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손 전 대표가 주목받지 못해왔던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붙인 이름이다.
특히 손 전 대표가 지난 10월 20일 2년 2개월 만에 정계 복귀를 선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오르며 정국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여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자 '지독한 징크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손 전 대표는 지난 재보궐선거와 20대 총선 당시에도 정치권에서 꾸준한 러브콜을 받아왔지만 "정계 복귀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강진 토골을 떠나지 않아왔었다.
그러던 그가 "87년 헌법체제가 만든 6공화국은 그 명운을 다했다"며 '개헌'이라는 '회심의 카드'를 높이 들자마자 다시 조용히 집어넣어야 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손학규 징크스'의 시작은 10년 전인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염두한 '100일 민심 대장정' 전국투어를 돌고 마지막 종착지인 서울역을 향하는 중이었다. 서울역에는 그의 지지자들이 집결해 있는 상황이었고,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만 남아 있었다.
부푼 기대와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던 KTX 안에서 손 전 대표는 북한의 첫 핵실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손 전 대표의 회고록 표현대로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2007년 1월 16일 손 전 대표는 미래의 국가 생존전략으로 '21세기 광개토 전략'을 공개했다. 당시 이명박ㆍ박근혜 후보자와 함께 한나라당 대권주자 빅3로 굳히기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고건 전 국무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전격적으로 선언하면서 '야심찬 승부수'도 조용히 묻히게 됐다.
징크스는 같은 해 3월에도 이어졌다.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반발하며 탈당을 선언한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대권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되며 관심을 뺏겼다.
당적을 바꿔 민주당 대표로 변신해도 징크스는 계속됐다.
2010년 11월 당시 손 전 대표는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특검 및 국정조사' 관련 '100시간 국회 농성' 후 장외 투쟁을 결심했다. 장외 투쟁은 서울역 광장에서 1주일 동안 철야 농성ㆍ대국민 서명운동 등을 진행하고, 이후에는 광화문 1인 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손 전 대표가 장외 투쟁에 돌입한 이튿날,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게 되며 그는 곧바로 농성을 접고 국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손 전 대표는 2011년 6월에는 국회를 '민생 국회'로 규정하며 쇄신을 촉구했지만, 곧바로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게 되는 등 징크스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