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배터리업계 모범기준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연간 생산능력 기준을 40배 높였다.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뛰어난 기술력에도 중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하기 어려워졌다. 사진은 LG화학 오창공장 전경. /LG화학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서 한국 등 전기차 배터리 선도기업들의 진입 허들을 대폭 높였다.
24일 중국 공업정보화부의 자동차 배터리업계 모범기준 개정안 의견수렴안에 따르면 리튬이온 전지 생산기업의 연간 생산능력 기준을 80억와트시(Wh) 이상으로 상향된다. 종전 2억Wh에서 40배나 높아지는 것이다. 기업에 2년간 중대한 안전사고가 없어야 한다는 기준도 추가했다. 공업정보화부는 배터리 기업의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능력 개선과 구조조정 필요성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의견수렴안은 업계와 전문가의 추가 의견수렴을 거쳐 내년 초 개정안으로 확정될 전망이다. 개정안이 확정되면 삼성SDI, LG화학 등 국내 전기차 배터리 기업에도 악영향이 미칠 예정이다.
현재 중국 내에서 연간 생산능력 80억Wh를 달성한 기업은 비야디(BYD)와 닝더스다이 뿐이다. 80억Wh는 내년 출시되는 GM의 고성능 순수전기차 볼트(60㎾h) 13만대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LG화학은 중국 난징에 연산 5만대 규모로, 삼성SDI는 시안에 연산 4만대 규모의 생산설비를 운영하고 있다. 두 기업 모두 생산능력을 3배가량 늘려야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셈이다.
중국에 연간 생산능력 80억Wh를 구축하려면 약 100억여 위안(약 1조6980억원)을 투자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기준에 맞춰 증설하려면 3년 이상이 걸린다"며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아예 중국에 설비가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세계 최대 생산능력을 갖춘 LG화학의 글로벌 생산능력이 연간 18만대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의도적으로 충족하기 어려운 기준을 설정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중국 정부는 안전성과 성능, 개발 등에서 일정 기준을 갖춘 배터리 업체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며 올해 초 '모범기준'을 정했다. '짝퉁' 배터리를 만들거나 사용 중 배터리가 폭발하는 등 기준 미달 업체가 난립하며 사고도 잇따르자 심사를 통해 이를 걸러내겠다는 의도였다.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업체의 배터리에는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혀왔다. 중국의 전기차 보조금은 차량 가격의 30%에서 최대 절반에 달하기에 중국 시장에서는 보조금 지급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지난 1월 중국 정부은 고밀도 배터리인 NCM(니켈·코발트·망간) 계열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버스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NCM 계열 배터리는 한국·일본 등 기술력을 갖춘 선도 기업들이 주로 생산하는 반면, 기술력이 부족한 중국 업체들은 대부분 저밀도 LFP(리튬·인산·철) 계열 배터리를 생산한다. 당시 NCM 배터리에 대한 보조금이 끊기며 중국 전기 버스 배터리 시장에서 선도 기업들은 대부분 강제 퇴출됐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인증을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규정만 본다면 인증과 보조금 지급을 연계하지 않겠다는 의미지만 업계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이미 전기 버스 시장에서 보조금을 수단으로 자국 업체 감쌌던 만큼 전기차 시장 전역에서 보조금을 무기로 휘두를 것이라는 우려다.
6월 있었던 제4차 심사 이후 계속 심사를 미루고 있는 것도 의혹을 산다. 중국의 모범기준 심사는 작년 11월 시작돼 2~3개월 단위로 열려왔다. 4차 심사에서는 1년간의 중국 내 생산이력을 요구했고, LG화학과 삼성SDI의 인증 탈락은 이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추정됐다. 양 사 모두 "다음 심사에서는 생산이력 1년을 충족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업계가 9월로 예상했던 심사는 계속 연기됐고 결국 기준 강화라는 카드가 나온 것이다.
심사 지연 등 중국 정부의 부정적 태도가 지속되자 LG화학은 중국 난징공장 배터리 라인 증설 추진 계획을 취소하고 최근 오창공장에 생산라인을 증설했다. SK이노베이션도 지난 4월 밝혔던 중국 내 생산시설 구축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연내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삼성SDI 역시 "보조금 지급이 없는 저속 물류차 시장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사업의 어려움을 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내에서도 새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이 두 곳 뿐인데 다른 중국 기업들의 인증을 취소하지 않는 이상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며 "의견수렴 등의 과정에서 업계와 적정한 조율을 거칠 것으로 예상한다"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