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29일 인적분할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다. 사진은 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오세성 기자
삼성전자가 인적분할 카드를 꺼내들었다.
삼성전자는 29일 이사회를 열고 주주가치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는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이 처음으로 언급됐다. 회사 측은 "그동안 사업구조를 간결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으며,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과 해외증시 상장의 기대효과 등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전략, 운영, 재무, 법률, 세제 및 회계측면에서 다양하고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 외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의뢰해 함께 협업하고 있다"며 "지주사 전환에 대한 검토에 최소 6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주회사 전환, 이재용 체제 출범의 열쇠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로 연결된다.
우선 인적분할은 하나의 기업을 2개 이상으로 나누는 기업 분할 방식이다. 분할 이전 기업 주식을 가진 주주는 분할 이후 나눠진 기업 주식을 동일하게 받는다. 삼성전자 주식 10주를 가지고 있다면 회사가 삼성전자A와 삼성전자B로 나눠질 경우 A 10주와 B 10주를 받는 식이다.
이번에는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는 안이 검토된다. 지주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보유하는 회사이고 사업회사는 사업을 하는 회사다. 지주사는 오너의 경영권 확보만을 위한 회사인 셈이다.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고 이재용 부회장이 지주회사의 주식을 선택하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59%에 불과하다. 이건희 회장과 특수관계인·계열사 지분 등을 합해도 18.2%다. 반면 외국인 지분은 50%를 넘긴다. 언제든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7.2%를 가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 등 삼성가 지분을 다 합하면 30.86%에 달한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22%와 삼성생명 지분 19.3%를 가지고 있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5%를 가지고 있어 삼성물산을 통해서만 삼성전자 지분 11.72%를 확보하게 된다.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면 삼성물산은 각각 회사 지분 11.72%를 받게 된다. 이후 지주회사와 사업회사가 지분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공개매수(스와프)하면 삼성물산은 사업회사 지분을 팔아 지주회사 지분을 더 늘릴 수 있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지분 1%(164만327주)를 구입하려면 3조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지주회사 전환은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에 필수적인 열쇠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을 의식해 이를 적극 추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최순실 게이트 연루 의혹도 삼성을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엘리엇,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두고 삼성그룹과 대립각을 세웠던 엘리엇이 이번에는 구원투수가 됐다.
미국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지난 10월 5일 삼성전자에 주주 가치 증대를 위한 제안을 보냈다. 제안서에는 ▲삼성전자 인적분할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물산의 합병 ▲30조원 특수배당 ▲삼성전자 사업회사의 한국거래소·나스닥 공동상장 등이 포함됐다.
엘리엇의 요구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와 맥을 같이 하며 삼성은 자연스레 인적분할을 공식화할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자사주 13.3%도 인적분할 시 지주회사의 사업회사 지분율 확대에 사용할 수 있어 더욱 유리하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인적분할을 마친 후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물산을 합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엘리엇의 제안대로면 주주들도 이득을 본다. 엘리엇은 "지주회사 체제가 되면 삼성전자 주가 상승 여력이 30% 이상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은 문제는 개정안, 시간 많지 않아
삼성전자는 외부 자문에 6개월 정도 걸린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놨지만,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진 않다. 최근 최순실 사태로 여당의 활동이 위축된 가운데 야권이 기업 견제를 위한 법안들을 이번 정기국회에 대거 발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3일 대표발의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중요하다. 이 개정안은 대기업집단에 속한 회사가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분할 전에 자사주를 미리 소각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행법에서 자사주는 의결권을 갖지 못하지만, 인적분할을 하는 경우 의결권이 사실상 부활한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대기업 총수들이 인적 분할로 경영권을 확보하는 행보를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개정안이 통과된 후 삼성전자 인적분할이 이뤄지면 자사주 13.3%도 소각해야 한다. 이럴 경우 지주회사 충족을 위한 계열사 지분 확보(상장회사 기준 20%)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에 인적분할과 지배구조 개편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삼성그룹이 인적분할에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