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가 30일(현지시간) 감산에 합의함에 따라 국내 경제에 끼칠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OPEC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정례회의에서 9시간에 걸친 진통 끝에 원유 생산량을 일 3250만 배럴까지 줄이기로 합의했다. 이는 10월 1일 평균 생산량 대비 120만 배럴 줄어든 규모다.
◆국제유가 상승에 조선업 숨통 트이나
OPEC이 감산을 결정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일 150만 배럴 감산 결정 이후 처음이다. OPEC의 감산 결정에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9.3% 급등한 49.44 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9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폭이다. 감산 결정에는 OPEC 비회원국인 러시아도 일 30만 배럴을 감축하겠다며 동참 의사를 밝혀 당분간 국제유가는 상승세를 보일 전망이다.
업계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60~70달러 선을 형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원유 가격이 배럴당 55~70달러를 형성할 것으로 전문가들이 전망한다고 보도했다. 도이체방크증권은 "60달러 안팎이 스윗스팟(최적지점)이 될 것으로 시장 참가자들이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국내 경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우선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조선업계가 국면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은 해양플랜트를 주력으로 삼고 있다. 저유가가 장기화되며 해양플랜트와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등의 수주가 끊겼고 인도연기와 발주 취소도 이어졌다. 때문에 국내 조선 빅3는 구조조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바다에서 원유를 채굴하는 해양플랜트는 당초 유가가 60달러를 넘어야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현재는 50달러 중반에도 이익을 낼 수 있도록 개선됐다. 해양플랜트가 늘어나면 플랜트에서 시추한 원유를 육지로 옮길 VLCC도 필요해진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올라야 해양플랜트와 VLCC 발주가 회복된다"며 "최근 지연된 해양플랜트 인도도 이뤄질 수 있어 조선업계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유·화학업계는 '함박웃음'
정유·화학업계는 재고평가이익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됐다. 재고평가이익은 싼 값에 사둔 원유를 휘발유, 경유 등으로 만든 뒤 국제유가 상승분을 적용해 판매해 이익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업계는 원유를 1~2개월 미리 구입한다. 원유 운송에만 한 달 가량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최근 이어진 저유가로 배럴당 40달러 선에 원유를 사들였고 비축량도 많은 상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은 보통 두바이유를 사용하는데, 서부텍사스산 원유나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을 하루 차이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며 "시차효과가 정유사 영업이익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30일(현지시간) WTI 가격은 9.3% 급등했지만 두바이유 가격은 전날보다 53센트 하락했다.
다만 정유사의 영업이익에 직결되는 정제마진은 일시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정제마진은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의 가격에서 운영비용과 원유 등의 비용을 뺀 이익이다. 지난달 초 배럴당 9.9달러를 돌파했고 현재도 7~8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4~5달러를 넘겨야 수익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제품 수요가 충분해 정제마진이 떨어지더라도 곧바로 회복될 것"이라며 사상 최대 실적 달성을 앞둔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국내 정유4사는 사상 최고 실적인 '영업이익 7조원'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화학업계 역시 원재료 가격 상승에 따른 제품 가격 상승을 기대하고 있다. 싼 값에 미리 사둔 원유로 만든 화학제품에 현재 원유 시세를 반영하면 이익을 더 늘리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 유가가 감산 기대감을 반영해 서서히 오르며 에틸렌 등 화학제품 가격은 이미 상승세를 탔다.
다양한 소비재의 원료로 쓰여 '석유화학의 쌀'이라 불리는 에틸렌은 작년 평균 가격이 t당 605.6달러였지만 올해 11월 4주 가격은 916달러다. 지난 10월 독일 바스프 공장 사고로 공급량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서 에틸렌을 생산하는 기업은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감산으로 인한 유가 상승분이 제품 가격에 반영되면 수익성이 더욱 좋아질 것"이라며 "수요도 충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합의는 합의일 뿐' 우려도
다만 OPEC의 이번 감산 합의가 이행으로 연결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UBS의 아트 카신 NYSE 담당 국장은 "합의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의 그렉 셰어나우 포트폴리오 매니저 역시 "이번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내년 중반까지 석유 공급량이 급등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OPEC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콜럼비아대학교 글로벌 에너지정책센터 담당자 제이슨 보르도프는 "이번 합의는 긍정적이지만 미국의 셰일 가스가 석유 감축량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셰일가스 생산업체들은 배럴당 50달러 이하 가격으로도 생산이 가능하다"며 "시추장비도 꾸준히 늘어나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