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사업계획도 아직 확정 못 했는데 큰일이네요…."
재계 한 임원의 한숨 섞인 말처럼 '최순실 게이트'가 국정뿐 아니라 재계의 경영까지 마비시켰다.
15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상당수의 주요 그룹들은 연말 인사를 확정짓지 못한 상태다.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라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현재까지 인사를 끝낸 곳은 LG, 한화, GS, LS, 코오롱등에 불과하다.
재계 맏형 격인 삼성그룹은 통상 12월 첫 주에 인사를 단행해왔다. 지난해의 경우 12월 1일에 사장단 인사를 하고 3~4일 뒤 임원인사, 다시 3~4일 후 계열사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2014년도 12월 1일, 2013년은 12월 2일에 사장단 인사를 했다. 매주 수요일 운영하는 사장단 회의에서 새로 선임된 사장들이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선호됐다.
하지만 올해는 사장단 인사부터 감감무소식이다.
◆삼성, 굵직한 이슈에 경영 시계 멈춰
재계에서는 당초 갤럭시노트7의 조기 단종과 비브랩스·하만 등의 인수로 삼성이 연말에 대규모 인사와 조직개편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올해는 삼성의 사장단 인사가 무기한 연기됐다. 우선 지난 6일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며 인사를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청문회 일정이 겹치며 매년 12월 초에 열던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시상식도 연기됐다. 매년 12월 하순 경기도 용인 인재개발원에서 열리던 '사장단 워크숍' 역시 사실상 개최가 물 건너갔다. 사장단 위크숍은 새롭게 꾸려진 사장단이 상견례를 하며 내년 경영전략을 구상하는 자리였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사장단·임원 인사가 5월로 미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검의 수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정당국 등에 따르면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15일 업무분장을 마무리했다. 일부 대기업 총수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도 시행됐다. 앞서 검찰수사 단계에서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 총괄사장 등이 출국금지 됐다.
특검의 본격적인 압수수색과 참고인·피의자 소환조사는 내주 시작될 전망이다. 소환 대상에는 삼성의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더해 22일로 예정된 국조특위 5차 청문회에서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야당에서는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차장(사장)의 증인 채택도 강력하게 요구하는 상황이다. 사실상 조직개편을 검토하기 어렵게 됐다.
삼성은 국정조사 청문회와 특검 수사가 마무리된 후 사장단 인사와 임원인사 등을 간략하게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7년 특검 수사 당시 삼성은 정기인사를 이듬해인 2008년 5월에 실시하고 8개월 만인 2009년 1월에 다시 인사를 한 바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현대차·SK 연내 확정엔 변함 없어, 롯데와 포스코는 내년으로
현대차그룹은 연내 계열사 임원인사와 사업계획 수립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그룹의 인사는 통상 12월 말에 이뤄졌다. 올해 역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28일 전후에 인사가 발표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인사는 성장 둔화를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11월까지 국내시장에서 현대차는 전년 동기 대비 7.2% 감소한 58만6481대가 판매됐다. 해외에서도 판매량이 감소했다. 파업 등의 여파로 글로벌 시장 성장률이 둔화된데 이어 트럼프 정권의 출범으로 예상되는 보호무역 여파도 우려스러운 일이다. 현대차는 내주 열리는 해외법인장 회의에서 내년도 판매전략을 논의할 계획이다.
SK그룹 역시 이달 내에 인사를 단행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구체적인 시기와 인사 폭은 확정되지 않았다.
당초 SK그룹은 큰 폭의 사장단 인사가 관측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CEO들에게 혁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SK의 발목도 잡았다. SK는 최태원 회장 사면, 서울 시내면세점 선정 등을 위해 최순실 일파의 사업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샀다. 대규모 인사 개편을 하기엔 외부 시선이 의식되는 상황이다.
SK그룹은 김창근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정철길 에너지·화학위원회 위원장(SK이노베이션 부회장)을 유임시키며 조직을 추스르는 소폭 인사로 가닥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SK 수펙스추구협의회 글로벌성장위원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 7월 가석방돼 10월 법정 형기를 모두 채웠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은 아예 내년 초로 인사를 공식 연기했다. 지난 10월 말 그룹쇄신안을 발표하며 인사와 조직개편을 계획했지만 신동빈 회장 등 총수 일가에 대한 횡령·배임 재판이 진행 중이며 오는 22일 2차 공판도 예정됐다. 면세점 입찰로 인해 최순실 게이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문제다. 롯데그룹은 정책본부 축소와 계열사 책임경영 강화, 준법 강화 등을 골자로 한 개편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인사를 포함한 조직 개편이 내년 1~2월에나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3분기 4년 만에 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 1조원을 탈환한 포스코도 최순실 게이트의 직격탄을 맞았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내년 3월 임기가 종료된다. 권 회장은 이사회에 연임 의사를 밝혔지만, 최순실의 입김으로 회장에 선임됐다는 의혹이 나와 난관에 봉착했다.
포스코는 "권 회장과 부인인 박충선 대구대 교수는 최순실 등 비선실세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과도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다"고 공식 해명을 내놨다.
권 회장은 오는 22일 국조특위 5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만큼 이 자리와 특검 조사에서 최순실 게이트와 무관함을 밝혀야 하는 입장이다. 이럴 경우 1월 이사회에서 부실 계열사 정리와 재무구조 개선에 기여한 권 회장의 연임이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