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는 한국경제의 '뿌리이자 경제 안전망'이다. '회계'라는 경제 안전망이 무너지면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 뿐만 아니라 기업의 신뢰도 무너진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은 2일 어려움에 처한 대한민국호(號)와 위기의 회계업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털어놨다. 회계업계는 최근 경기 침제와 맞물려 미공개 정보를 활용한 주식거래, 분식회계 기업에 대한 감사 실패 등의 사건이 잇따라 터지며 '60여년 만에 최대 위기와 불황'을 겪고 있는 상태다.
최 회장은 "회계는 기업들에 부담을 주는 '비용'이 아니라 기업과 투자자, 나아가 국가를 위한 '공공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회에서는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 제정과 개정이 늘고 있고, 정책당국에서도 '지정 감사인' 제도를 확대하는 등 회계 관련 정책을 적극적으로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기업과 최고경영자(CEO)의 인식변화도 주문했다. 기업과 경영자는 투명한 감사를 통해 자본시장과 직원, 거래처 등 이해 관계자들에게 신뢰를 얻고 이것이 결국 기업 가치를 끌어 올리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
기업들이 회계감사 비용지출에 인색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감사 방법과 품질은 발전해온 데 비해 감사 보수는 미국 등 선진국의 20% 수준밖에 안 된다"며 "감사는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회계사는 자본시장의 파수꾼'이라는 표현을 인용해 "회계사는 경제 그 자체의 파수꾼"이라는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에 대한 걱정도 잊지 않았다. 최 회장은 "올해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협요인은 부채, 미국의 금리인상, 트럼프의 보호무역정책 등이 될 것"이라며 "경제 컨트롤 타워를 제대로 세우고, 정부는 외화 유동성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료시절 외환시장에서 그는 '최틀러(최중경+히틀러)'로 통했다. "회계가 바로서야 경제가 바로선다"며 '회계 전도사'를 자처한 최 회장의 2017년 계획과 한국경제가 나갈 방향을 들어봤다.
-회계시장의 현주소를 어떻게 보나.
"우기다. 불황을 어떻게 이겨낼 지 고민이다. 회계업계는 최근 경기 침제와 맞물려 '60년 만에 최대 불황'을 겪고 있는 상태다.
기업들이 회계감사 비용지출에 인색한 게 문제다. 감사 방법과 품질은 발전해온 데 비해 감사 보수는 미국 등 선진국의 20% 수준밖에 안 된다. 현재의 감사보수 결정 체계는 품질경쟁이 아닌 가격경쟁만 존재하는 시장실패의 대표적 사례다. 감사는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금융위원회와의 협의를 통해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내 회계사 보수규정을 담을 계획이다. 예컨대 자산규모에 따라 기본보수를 정하고 여기에 사업장수에 따라 가산보수를 더하는 식이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수익구조를 넓혀 가야 하는 것은 회계법인과 업계 스스로의 몫이다."
-대우조선 사태 등으로 회계사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
"기업의 회계부정이 있을 때마다 회계사만을 문제 삼는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 2014년 금융시장을 발칵 뒤집은 중견 가전업체 모뉴엘의 사기대출 사건을 봐라. 똑똑한 회계사들, 한국무역보험공사 직원들도 모뉴엘에서 1년 넘게 조작한 서류 앞에서는 꼼짝없이 당했다. 회계사들에게 수사권이 없는데 '이 서류 제대로 작성한 것이냐'고 따져 묻거나,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할 수 없는 것 아니냐. 모뉴엘이 작정하고 만든 한 편의 드라마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동안 발생한 회계부정 사건마다 '회계정보 검토자'를 처벌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통제하려 했지만 실효성이 미흡했다. 이제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회계부정 당사자인 '회계정보 생산자', 즉 기업의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회계사들 스스로도 돈 몇 푼 벌자는 생각으로 일하지 말고, 전문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지정감사제'도입 목소리가 많다.
"국제 경쟁력 평가 기구인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지난해 발표한 한국의 회계 투명성은 조사 대상 61개국 중 61위로 꼴찌다. 지난 2012년 기록한 41위보다 오히려 20단계나 떨어졌다. 기업의 부실이 드러난 이후에나 뒤늦게 과거 회계부정까지 드러나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이 처럼 한국의 회계 투명성이 전 세계 꼴찌 수준인 것은 '자율수임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이다.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치고 도움이 필요한 유망 기업에 제대로 된 금융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독립성이 보장된 감사위원회가 경영진을 감시한다. 또 이들이 감사인을 정한다. 반면 한국은 회계감사를 받는 오너나 경영진이스스로들 들여다 볼 감사인을 고른다. 심각한 이해 상충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대우조선해양에 10년간 수없이 많은 감사가 왔다 갔지만 회계 부정이 드러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들이 부실을 덮을 감사를 찾는 회계 쇼핑의 단면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문제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한국의 기업 특성상 감사위원회 독립성을 확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답은 하나라고 본다. 미국 처럼 독립성이 보장된 '지정감사'를 확대한 것이다."
-회계인으로써 한국 기업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동안 국제회계기준을 도입해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국제감사기준을 도입하는 등 국제무대에서도 손색이 없는 회계 인프라를 갖췄다. 하지만 회계사의 사회적 위상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간다. 회계사는 회사 경영자를 만나 회사의 현황에 대해 논의하면서 감사위험이 어디에 있는 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영자를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회사 경영자가 매우 바쁜 탓도 있겠지만 회계감사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기업에 이윤 추구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한 축으로 보다 투명한 경영활동을 요구하고 있다. 경영자가 회계감사를 '규제'로 여기고 있지만 회계감사를 통해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를 받는 점을 고려해 자신이 수혜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주주, 채권자, 종업원 등도 이해관계자로서 제대로 된 감사를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국제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미국이 언제든지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국을 세 차례 배신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얄타회담, 애치슨라인 선포 등이 그 예다. 특히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한반도의 반을 떼어 주면서 동북아의 교두보(남한)를 확보한 것은 미국 편의적인 생각에서 민족분단의 비극을 야기했다. 상하 양원을 공화당이 지배한 상황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된 트럼프가 얼마나 자신의 색을 드러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보다는 공정무역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나 나프타 역시 폐기보다는 재검토(Review)하자는 얘기부터 할 것이다. 세계 경제를 전망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로 미국 기준금리 인상의 속도와 폭이 될 것이다. 트럼프는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1조 달러를 인프라에 투자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급격한 금리 인상 가능성은 작다. 다만 미국 경제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인상에 나설 수 있으니 그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한국경제를 어떻게 보나, 스칸디나비아형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위기 방어막괴 기초체력은 튼튼하다. 외환보유액은 3720억달러(11월 말 기준)에 달한다. 순대외채권 규모는 3835억 달러(9월말 기준)에 달한다. 6월 말보다 257억 달러 늘면서 사상 최대다. 경상수지는 87억2000만 달러 흑자로 56개월 연속 흑자다. 우리나라는 지금 외부보다는 내부 위험 요인이 더 많다. 최순실 게이트와 김영란법 등에 따른 심리 위축으로 소비절벽이 현실화되고 있다. 시중금리가 오르고 있다는 점은 우려를 더한다. 시장금리가 오르면 대출금리가 올라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국내 제조공장 10곳 중 3곳(제조업 가동률 70.3%)은 멈춰 섰다. 10월 통계를 기준으로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8년(69.8%) 이후 18년 만에 최저치다. 특히 부동산 경기 부진과 가계 부채 심화로 한국의 내수 경기 둔화가 예상된다. 97년 외환위기 진원지는 경상수지 적자였다. 11월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도 아무도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1996년 경상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4%에 달했다. 1992년 629억달러였던 대외 지불 부담은 1996년 1643억달러로 연평균 27% 증가했다. 대부분 금융회사의 외화 부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7년 한국경제의 위험징후는 '부채'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달하는 등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아직은 부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경기회복 지연 가능성, 미 연준의 정책금리 인상에 따른 국내 금리 상승압력 등으로 향후 가계의 채무상환능력이 저하될 소지가 있다. 특히 저신용·저소득·다중채무자 등의 차주는 금리 민감도가 높아 금리상승 시 여타 차주에 비해 더 큰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부동산시장(LG경제연구원 2017년 건설투자 0.6% 성장) 버블이 꺼지다면 충격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늘어난 가계부채는 소비 여력을 제약하고 경제 성장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국내 자산시장 붕괴로 금융기관의 자기자본비율(CAR)이 떨어지면서 오는 '스칸디나비아형' 외환위기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누가 경제 수장이 되든, 대내외 위험 요인을 잘 관리해 거시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외화 유동성을 잘 관리하고 기업도 수익 증대보다는 비용 절감을 통한 내실 다지기에 주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