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인 조사는 받을 수 있죠. 근데 피의자라니 분위기가 싸늘합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자 서울 삼성그룹 서초사옥에는 무거운 공기가 깔렸다. 한 직원은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가 됐다는 것이 충격적"이라며 "사무실 분위기가 냉랭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상황을 전했다.
또 다른 직원은 "이 부회장이 그룹을 이끌기 시작했는데 최순실 게이트와 엮이며 안 좋은 일이 이어지고 있다"며 "예전 특검 때처럼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은 2008년에도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특검 수사를 받은 바 있다. 당시 특검은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차명보유와 9000억원대 비자금 운영 사실을 확인했다. 이 회장은 그해 4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직원은 "피의자로 소환한 만큼 특검이 이 부회장을 구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들을 봤다"며 "중요한 시기에 회사 업무가 모두 마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전했다.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분위기가 좋진 않다"면서도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계속 협조하며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미래전략실 직원들은 당직자를 제외한 전원이 이 부회장의 출석과 함께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출근했다.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오후에는 다들 서초사옥으로 복귀했다"며 "이 부회장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야근하는 직원들도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같은 의혹으로 특검 조사를 받은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은 15시간에 달하는 조사를 받았다. 이 부회장 역시 13일 새벽까지 조사받을 가능성이 높다. 특검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과 최씨 모녀에 대한 승마 지원에 대가성이 있는지 집중 조사하겠다는 방침이다. 이 부회장은 특검 사무실에 올라가기 전 포토라인에서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을 못 보여드려 송구하고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삼성그룹은 특검 수사로 대가성 의혹이 풀릴 수 있다는 희망도 품고 있다. 삼성그룹은 그간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등이 박근혜 대통령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강압에 의한 출연이기에 대가성도 없다는 논리다. 실제 특검 수사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이 부회장에게 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을 것을 요구했고 지원을 독촉하고 질책한 사실도 밝혀졌다.
특검은 '제3자 뇌물죄' 적용으로 방향을 잡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해당 죄목의 구성요건인 '부정 청탁'의 증거를 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삼성이 자금을 내놓는 대가로 청탁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삼성그룹은 특검 수사를 통해 이 부회장이 최순실·정유라 모녀에 대한 자금 지원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고 대가성이 없는 자금지원이라는 점이 밝혀지길 기대하고 있다.
만약 이 부회장이 구속되고 사법처리될 경우 삼성은 최악의 경영 공백 상황을 맞는다. 이미 연말 정기 임원인사가 무기한 연기됐고, 지배구조 개편과 연관된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 문제 논의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도 지난해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이 해체를 선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규 투자와 인수합병(M&A), 업무 제휴 등은 최고경영진이 앞장서야 하는 업무"라며 "경영 공백이 장기화된다면 삼성의 성장 동력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외신들도 이 부회장의 피의자 신분 소환을 속보로 다루며 삼성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2013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지만 이 부회장이 피의자로 지목되면서 삼성전자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포춘은 "이 부회장이 구속된다면 신규 투자 등 기업 성장 동력이 상실될 것"이라며 "(이 부회장의 구속은)이건희 회장의 와병보다 더 큰 위기"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