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 박람회 '소비자가전전시회(CES) 2017'에서 팀 백스터 삼성전자 부사장이 삼성전자가 구상하는 IoT 생태계를 설명하고 있다. /삼성전자
인공지능(AI)의 대두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제4차 산업혁명이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대표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구글 등 IT 기업을 중심으로 자율주행차가 실사용 가능한 수준까지 개발됐고 BMW 등은 2~3년 내 양산모델 판매에 나서겠다는 계획까지 밝혔다. 한국보다 기술이 부족하다 여겨졌던 중국도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기업의 창의성이 더해져 드론 산업 등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1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4차 산업혁명과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전문인력 6500명 양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자동차·ICT·AI·로봇·스마트공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융합형 핵심기술 전문인력을 키워 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성과를 얻을지는 의문이다.
◆기업, 4차 산업혁명 동력 잃어가
문제의 열쇠는 기업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민간 주도의 다양한 시도와 그를 뒷받침하는 정부 지원으로 추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영 시계는 멈춰버려 미래 산업 대응을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지난 11일 세계적인 정보분석회사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옛 톰슨로이터 특허 및 과학사업부)는 특허 경쟁력과 기술 영향력에서 앞선 글로벌 기업 100곳을 발표했다. 한국의 성적은 낙관적이지 않다. 미국이 40개, 일본이 34개, 프랑스가 11개 기업이 포함됐지만 한국은 3개 기업에 그쳤다. 하드웨어와 전자기기 분야에서 삼성전자, 가전 분야에서 LG전자, 에너지 분야에서 LS산전이 선정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높은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는 최근 경영활동이 마비되며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삼성은 그간 4차 산업혁명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1등이 되려면 1등에게 배우라"는 이건희 회장의 뜻에 따라 매주 수요일 진행하는 사장단회의에서도 4차 산업혁명 관련 강의가 많이 이뤄졌다.
삼성의 수요사장단회의는 지난해 여름 휴가기간을 제외하고 총 45회 열렸다. 이 가운데 에너지 산업의 미래, 4차 산업혁명과 바이오테크놀러지, 자율주행차·스마트카·전기차,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주제는 15가지였다. 매달 삼성 전 계열사 CEO가 모여 4차 산업혁명 대비를 고민한 셈이다.
투자도 오랜 기간 지속해왔다. 삼성은 스타트업 발굴 조직인 '삼성 넥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페이'의 모체가 된 루프페이도 삼성 넥스트가 초기부터 투자하며 육성한 곳이다. 루프페이는 삼성전자가 2015년 2월 인수한 미국의 모바일결제솔루션 업체다. 삼성전자는 루프페이에서 성과가 나타나자 인수해 안정화된 형태의 삼성페이를 선보일 수 있었다.
삼성은 이 외에도 모바일클라우드 솔루션 전문업체 프린터온, 미국의 서버용 SSD SW 전문회사 프록시멀 데이터, 미국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조이언트, 캐나다 디지털광고 스타트업 애드기어, 미국의 개방형 인공지능 플랫폼 업체 비브랩스, 미국 전장 전문기업 하만 등 활발한 M&A로 기술력을 확보했다. 특히 하만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9조원이 넘는 M&A를 이끌어내 국내 최대 규모의 M&A로 눈길을 끌었다.
◆'맏형' 부재… 생각보다 일찍 체감될 수도
이러한 M&A를 거치며 삼성은 사물인터넷(IoT) 가전, 인공지능 등에서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삼성의 IoT 냉장고 '패밀리허브'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해외 유수 기업들이 아마존의 AI 플랫폼 '알렉사'를 자사 기기에 도입하는 상황에서도 자체 AI 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을 기점으로 이러한 활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룹 차원에서 신규 사업 투자를 결정하고 책임질 오너가 경영 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초 미국에서 기자를 만난 삼성 넥스트 관계자는 "스타트업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중간 보고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윤부근 삼성전자 대표와 이재용 부회장에게 보고된다. 삼성은 질서를 매우 중요시하는 조직이다. 스타트업은 창조적 발상을 하는 만큼 '예외사항'이 자주 발생해 그룹의 눈총을 사지만 이재용 부회장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바꿔 말하면 이 부회장의 부재가 길어지는 동안 스타트업에서 발생하는 '예외사항'들은 볼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삼성의 경영 시계가 멈췄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지난 연말 완료됐어야 할 사장단 인사가 연기됐고 신년 사업계획 수립도 연기됐다. 올해 채용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8일에는 수요사장단회의가 취소됐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입원했을 때도 정상적으로 진행됐던 회의가 취소된 것은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부재를 뛰어넘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왔던 만큼 지금 당장은 아무런 영향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글로벌 10대 기업에 들어가는 한국 기업을 꼽으라면 삼성 외에 없다. 민간 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줄 맏형의 부재는 생각보다 일찍 체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