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4일 삼성전자가 자동차 전장(電裝)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미국 업체 하만(Harman)을 인수한다. 인수 총액은 80억 달러(약 9조3800억원). 국내 기업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를 계기로 대기업들이 기업 인수·합병(M&A)에 적극적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불똥에도 재계의 자발적 산업 재편 움직임과 재무구조 개선, 신사업 진출을 위한 기업의 자구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이를 주도하는 주인공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오너 2·3세들이다.
◆'JY' 등 2·3세 오너들이 위기 속에 띄운 승부수
"10조원으로 10년 이상 걸리는 진입장벽을 단번에 뚫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국 자동차 전장부품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하면서 나온 평가다.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에 취임한 후 곧바로 띄운 승부수 이기도 하다. 돈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투자 분야다. 전장부품에 무려 10조원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은 것. 어떻게든 자동차를 미래의 먹거리로 삼겠다는 이 부회장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주주들의 저항도 삼성전자의 계획에 걸림돌은 되지 않을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제시한 인수가격(80억 달러, 9조6000억원)이 너무 낮다"며 하만의 주주들이 잇따라 반발하고 있다. KB증권 김동원 연구원은 "충분한 우호지분을 확보하고 있어 하만 주주의 집단 소송이 M&A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것이다. 1분기 중 M&A절차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M&A에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대부분이 기업 간 거래(B2B) 업체들이다. B2B는 이 부회장이 전문인력 영입 확대를 지시할 정도로 삼성이 미래산업으로 키우는 사업군이다.
M&A가 계속되고 있지만 흔한 자금 걱정도 없다.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80조원을 넘나든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 안팎에선 삼성전자가 4차산업에서 또 다른 대규모 M&A에 나설수 있다고 본다. 조 단위의 매머드급 M&A를 통해 구글이나 애플 같은 주도권을 가지려 할 것이란 분석이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은 다른 회사를 사들이고 외부 기술을 수혈하는 데 유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바이오나 커넥티드카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데에는 지갑을 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루프페이를 통해 애플페이와 구글월렛 등에 맞 대응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LG그룹과 빅딜을 성사시켰다.
지난 23일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기판) 제조사 LG실트론을 6200억원에 인수키로 한 것. SK그룹과 LG그룹 사이에 이뤄진 '빅딜'로 평가된다. SK는 LG실트론 인수로 수직계열화를 통해 반도체 시장에서의 시너지를 높이고, LG는 여타 계열사와 연관이 없는 반도체 사업에서 28년 만에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SK는 2011년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2015년 OCI머티리얼즈(현 SK머티리얼즈)를 사들이며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도약했다. 그룹 안팎에서는 새로운 SK를 설계하려는 최 회장의 강한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다.
최 회장은 지난 2015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경영에 복귀했지만 이렇다 할 활동을 없었다. 그가 그리는 SK의 미래는 지난해 10월 SK그룹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CEO가 직접 글로벌 현장에 나가야 하며,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해 달라"며 ▲과감한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 ▲주요 사업조직의 중국·미국 등 글로벌 전진 배치 ▲핵심 사업의 글로벌 파트너링 강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확보 방안을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LG실트론 인수도 SK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여정의 한 걸음이다. 최 회장은 오는 2024년까지 46조원을 반도체 사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지난 2일 신년사를 통해서도 "'딥 체인지(Deep Change)'를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로 정하고 조직 내부로부터 근본적인 혁신을 해야 한다"고 또 한 번 변화를 주문했다.
SK텔레콤을 인적분할한 후 SK㈜와 합병하는 방안도 수면 위에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현 지배구조로는 핵심 계열사인 SK하이닉스가 공정거래법상 손자회사 규제를 받아 대규모 M&A를 추진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M&A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2004년 이후 36건의 M&A를 성사시킨 신 회장의 'M&A 본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평가다.
롯데케미칼은 싱가포르 석유화학업체 주롱아로마틱스(JAC)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주롱아로마틱스는 SK 등 국내외 기관들이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지난 2015년 업황 악화로 공장 가동 4개월만에 문을 닫았던 곳이다. 롯데면세점은 2월 초 시작되는 홍콩 공항면세점 신규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 참여를 놓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상장을 추진중인 호텔롯데도 M&A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기업공개(IPO) 통해 마련된 자금은 롯데의 몸집불리기에 쓰일 것으로 보인다. 호텔롯데는 지난해 5월 더 뉴욕 팰리스 호텔을 8억 500만 달러(약 9384억원)에 인수했다. 호텔롯데는 이달 초 보바스기념병원을 운영하는 늘푸른의료재단을 인수하며 검찰 수사 이후 그룹의 첫 M&A의 발을 뗐다.
◆ M&A는 혁신과 생존 문제
기업들은 왜 M&A에 주목하는 것일까. 글로벌 포춘(Global Fortune) 1000기업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CEO들은 기업 M&A의 주된 목적으로 '혁신(Growth)'과 '생존(Cost Reduction)'을 꼽는다. 레버리지를 극대화한 대마불사(大馬不死)식의 외형성장보다는 기존 주력사업의 영역 내에서 성장과 보완적 M&A전략이 73%를 차지한 것.
산은경제연구소 조경진 연구원은 "중국, 일본 등이 해외 M&A를 통해 미래성장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어 국내업계의 대응이 절실하다"면서 "향후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성장이 예상되는 레저, 소프트웨어 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로 M&A에 대한 부정적 인식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는 지적이 적잖다. M&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아 대기업들이 진행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모투자펀드(PEF) 중심의 M&A가 이어지면서 인수 매물에 한계가 생기게 됐다는 설명이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이나 SK 롯데 한화처럼 재무적 기반이 탄찬 그룹들이 불투명해진 경영 여건을 돌파하기 위해 적극적인 M&A에 나서는 것을 보고 다른 기업들이 자극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건전한 M&A는 한국 경제의 체질 변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