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가계대출 비중 . 2016년 9월 말기준자료=한국신용평가
"비은행 대출 과다, 부채가구의 연령구조, 독특한 전세제도와 주택대출제도 등 구조적 요인을 들어 관리에 힘써야 한다"(IMF)
미국의 경제학자 피셔(계량경제학의 창시자)는 1933년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이란 개념을 통해 경기 사이클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변수로 부채와 물가를 꼽았다. '호황 국면이 끝난 후 부채 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자산 가격 하락과 유동성 위축 등이 실물경제 침체와 물가 하락으로 확산된다는 것. 이런 디플레이션에서 실질 채무는 불어나고, 채무자는 소비와 저축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실물경제 침체와 물가 하락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게 부채 디플레이션의 요지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모습도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계부채는 1300조원을 넘어섰다. 시장에서는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부채절벽'이 가속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금리가 오르면 빚을 내고 싶어도 늘리기 어려운처지에 내몰릴 수 있어서다.
◆1300조 가계빚, 부담 더 늘어
2017년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험징후는 '부채'다. 특히 미국의 금리인상은 이 뇌관을 건들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2월 말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 잔액은 1344조3000억원이다. 1년 동안 141조2천억원(11.7%) 급증했다. 연간 증가액이 사상 최대치다. 특히 상호저축은행, 상호금융, 새마을금고 등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 잔액도 291조3000억원에 달한다. 저금리 상황에서 눈덩이 처럼 불어난 가계부채는 금리 인상기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부채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도 곳곳에서 나온다.
한은은 10개 신용등급 중 7∼10등급인 저신용 차입자의 대출 중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80%를 넘는 것으로 추정했다.
5곳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빚을 진 다중채무자도 지난해 말 기준 101만7936명(나이스평가정보)이나 된다. 2012년 말보다 5.0% 늘었다. 이들이 보유한 대출액은 108조9324억원으로 4년 전보다 20.9% 증가했다.
왜 금리가 걱정일까. 금리 오르면 갚아야 할 빚의 총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쌓인 가계부채는 금리 인상기에 큰 부담이 된다.
은행 가계대출에서 고정금리 대출 비중(지난해 말 기준)이 43.0%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 750조∼800조원은 금리 변동 영향을 받는 변동금리형으로 추정된다. 고정금리로 분류되는 대출도 5년이 지나면 변동금리 대출로 전환되는 '혼합형'이 많아 금리 상승의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말 국회 보고에서 대출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계의 추가 이자 부담이 9조원 늘어날 것으로 추정했다.
금융부채보유가규 대비 한계가구 비중 자료=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 한국신용평가 가공
◆대출금리 1% 오르면 한계가구 부채 25조 증가
가계부채의 위험성은 경험적으로 잘 안다. 눈덩이 처럼 불어난 부채가 순간의 정책 실패나 외부 충격과 결합할 때 충격은 핵폭탄급으로 돌변한다. 세계 경제사를 봐도 심각한 경기침체는 가계 빚에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전주곡이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는 가계부채가 주택시장의 버블 붕괴와 만나 터진 대표적인 사례였다. 1990년대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 역시 경기부양을 위한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 관련 대출 확대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자산거품이 꺼진 원인이 됐다.
이 처럼 가계부채의 악몽을 경험한 선진국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마다 과도한 가계빚을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빚을 줄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미래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1.6%나 된다. 1년 전에 비해 4.6%포인트 상승했다. BIS는 세계 43개국의 자료를 집계하는데, 한국의 증가폭은 노르웨이(7.3%포인트)와 중국(5%포인트)에 이어 세번째로 컸다.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43개국 가운데 8위를 기록했다. 미국(79.4%)이나 유로존(58.7%), 일본(62.2%), 영국(87.6%)보다 높은 비율이다.
시장에서는 이런 생계형 대출이 부실화하면 가계부채가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김종민(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은 자료를 토대로 대출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한계가구 금융부채가 25조원 급증한다고 분석했다.
한은은 지난해 6월 말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2014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토대로 가계부채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금리 인상과 주택가격 하락이 강하게 이뤄질 경우 가계 부문의 부실위험이 비교적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금리가 2%포인트 오르고 주택가격이 10% 하락하는 복합충격을 가정해 가계 부문 부실위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위험가구가 보유한 부채(위험부채) 비율이 19.3%에서 32.3%로 13.0%포인트나 상승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최근 정부서울청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금융시장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 "가계부채는 금융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위험) 요인"이라며 "최근 증가속도가 빠른 2금융권 가계대출의 경우 현장점검 강화와 함께 고위험대출에 대한 추가충당금 적립규모 확대 등 리스크 관리도 선제적으로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