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강갑봉 회장(가운데)을 비롯해 전국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대표자들은 5월 23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탈 규탄대회'를 열고 유통 대기업들에 '상생'을 강력히 촉구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골목상권과 동네 슈퍼는 더는 버틸 힘이 없다. '노브랜드'(No brand) 때문에 동네 상권 다 죽는다." 지난 5월 23일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건물에서 '대기업 골목상권 침탈 규탄대회'를 열고 이같이 주장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영토를 확장 중인 대기업과 생존위기에 몰리고 있는 소상공인들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소상공인 보호'를 전면에 내세운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영세 자영업자 중심의 '골목상권'과 대기업 계열 유통시설·프랜차이즈 사이에 다툼이 커지고 있는 것.
문 대통령은 복합쇼핑몰 규제와 더불어 적합업종 지정 법제화까지 공약했다. 현재 동반성장위원회는 매년 특정 업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하고 이들 품목에 대해 3년간 대기업의 사업 확장과 진입 자제를 권고하는데, 적합업종 지정을 법제화하겠다는 것.
하지만 국민 10명 중 8명(중소기업중앙회 설문 78%)이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등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규제에 공감하고 있지만 이들은 동네 슈퍼와 빵집, 재래시장에서 지갑을 열지는 않고 있다. 시장(골목상권)의 효율을 살릴 대책이 절실하다.
◆프랑스의 실패 교훈…골목상권 보호 실효 정책 절실
김상조 공정위원장 후보자는 취임 후 과제 1순위로 "골목상권 문제를 우선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김 후보자는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출발이라면 경제민주화 완수는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등 약자들 삶의 개선이라고 하니 (문재인) 대통령이 좋아하셨다"고 전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재벌은 신생 독립국의 경제가 짧은 시간 내 성장하는 데 기여한다. 다만 중소기업·협력기업과의 상생이나 공정거래에는 아쉬움이 꽤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더 넓은 글로벌 세상에 가서 경쟁하고 골목으로 들어와서 경쟁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맹본부와 유통업 등의 대기업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통해 가맹·대리점과 골목상권 등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프랑스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프랑스 유통업 규제 변화 및 국내유통정책에 대한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는 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소매업 개점 제한 규제인 '로와이에법'을 지난 1970년대부터 제정해 실시해 오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로와이에법 시행 이후 오히려 소규모 점포의 매출이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소규모점포인 전문식료품점의 매출액은 1970년 32.2%에서 2013년 17.8%로 크게 줄었다. 반면 대형점포에 속하는 하이퍼마켓의 매출액은 1970년 3.6%에서 2013년 36.5%로 증가했다. 또 기업형 슈퍼마켓의 매출도 1970년 9.0%에서 2013년 28.8%로 증가했다.
한국시장도 프랑스를 닮았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3개사의 연도별 매출은 영업규제가 시작된 2012년 이후 ▲2012년 22조1950억원 ▲2013년 20조3320억원 ▲2014년 19조5790억원 ▲2015년 18조5840억원 등으로 감소했다. 전통시장을 포함한 중소유통 매출도 2012년 대형마트 규제가 시작된 이후 105조7000억원에서 2015년 101조9000억원으로 3년간 3조8000억원이 줄었다.
◆규제가 소비자 지갑 열지는 않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인지과학자인 허버트 사이먼은 강자와 약자를 보는 심리적 편향을 투견판에 빗댄다. 사람들은 강자인 '탑독(Top dog)'의 위세에 눌려 신음하는 '언더독(Under dog·상대적 약자)'을 동정하는 심리적 편향을 보인다는 것.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는 승자에 철저히 편승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가 나타난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밴드왜건 효과가 언더독 효과를 압도한다.
이는 논란이 되는 골목상권 보호 문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의 쇼핑 대체 방안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전통시장'이라는 응답은 9.4%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동네 중·대형 슈퍼마켓'이나 '다른 날 대형마트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전통시장 매출은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이 실시된 2012년 20조1000억원에서 2013년 19조9000억원으로 오히려 줄었다.소비자들은 바게트를 하나 사더라도 동네 빵집보다 프랜차이즈를, 상품의 회전이 활발해 채소는 대형 마트를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정과 기업가 정신에 호소하는 규제나 정책만으로는 골목상권을 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유통 대기업 한 관계자는 "효율이 중시되는 시장경제 체제에 평등의 가치적용이 과도해지면서 경제 전반의 경쟁력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시장의 효율성을 살리기 위한 정책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골목상권을 살려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스몰 비즈니스 새터데이'(Small Business Saturday)에 참가해 골목상권 살리기를 호소했다. 스몰 비즈니스 새터데이는 아멕스(AMEX) 카드가 골목상권 보호와 소상공인 돕기를 목표로 2010년 처음 선포한 행사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지난 정권의 실패 경험 때문에 우려가 적잖다. 경험상 단순한 재벌 때리기는 불황에 취약하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재벌 옥죄기로 대기업 투자가 위축되면 문재인 정부의 최대 공약인 일자리 늘리기도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또 반기업정서가 퍼지고 결국 내수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골목상권 보호 문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민할 문제다. 소비자들을 자연스럽게 동네 풀뿌리 상점으로 향하게 할 환경을 조성하지 않는 한 골목상권 부활은 꿈꾸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혁신적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대기업과 중소상인의 상생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