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주회사를 포기했다. 지난 4월 27일 이사회를 열어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기로 한 것. 사실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의미여서 파장이 컸다. 지주회사 전환은 계열사간 지분보유를 통한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력한 승계작업의 하나로 여겨졌기에 더 그랬다. 삼성전자는 "향후에도 삼성전자는 지주사 전환 계획이 없다고 봐도 된다"고 밝혔다.
시장의 관심은 현대자동차그룹에 쏠려 있다. 그룹 지배구조 개편과 순환출자 문제가 얽혀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의 '10대 공약' 가운데 '기존 순환출자 해소' 항목이 빠졌지만, 접은 것은 아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후보자는 "5년 전 선거를 치를 당시에는 14개 그룹 9만8000개의 순환출자 고리가 있었는데 지난해 기준으로는 8개 그룹 96개였고, 최근에는 7개 그룹 90개 고리가 남아있다. 많이 변했다"면서 "순환출자가 총수 일가의 지배권 유지 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룹은 현대차그룹 하나만 남았다"고 지적했다. "기존 순환출자 해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것부터 해야할 만큼 우선순위가 높은 과제가 아니라는 차원으로 이해해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순환출자 해소, 투자·고용에 부담 줄라
문 대통령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였을 때 기존 순환출자까지 해소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놨지만, 막판 고심 끝에 기존 순환출자 해소 추진 공약에서 뺐다. 덕분에 순환출자 고리가 얽혀 있는 기업들은 당장 걱정은 덜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재벌의 불법 경영승계, 황제 경영, 부당 특혜 등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강경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 재벌그룹(대규모 기업집단)의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을 고쳐 기존 순환출자의 해소를 추진하고, 총수 일가가 공익법인이나 자사주를 활용해 편법적으로 지배력 강화를 도모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공약도 했다. 시기의 문제일 뿐 기존 경제 민주화 공약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후 칼을 뽑을 것이란 게 재계의 판단이다.
새정부 첫 임시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기존 순환출자 해소 관련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지난해 9월 발의된 이 법안은 4개월 가까이 묵혀 있다가 올해 1월 11일에 상임위에 상정된 이후 특별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SK증권 최관순 연구원은 "법안 통과 시 기존 순환출자를 보유한 기업집단의 재무적 부담이 될 수 있다"면서 "현대차의 경우 지주회사 전환을 고려한다면 순환출자 해소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대기업의 순환출자 해소 비용은 약 11조원에 달한다.
기존 순환출자 해소 카드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등 순환출자 고리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 대기업에 큰 부담이다. 증권가에 따르면 현대차의 경우 6조원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투자증권 윤태호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은 오너 지배력 강화 이외에 사업 효율화, 주주환원정책강화, 지배구조 투명성 등을 동시에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화재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물산의 지분을 모두 매각하면 순환출자가 해소된다. 이를 인수하기 위한 자금은 1조50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롯데그룹은 순환출자 해소 비용으로 약 4000억~1조5000억원이 소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가뜩이나 투자심리가 꽁꽁 얼어붙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라고 할 경우 대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돈을 쓰느라 4차산업 등 새 먹거리 투자나 고용을 주저하게 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순환출자와 얽혀있는 지주회사 전환을 포기하면서 "지주회사로 전환할 경우 전반적으로는 사업경쟁력 강화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경영 역량의 분산 등 사업에 부담을 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한 데서 기업들의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삼성, 현대차, 롯데(비지주회사) 주요 계열사의 자사주 보유 현황자료=SK증권
◆자사주의 마법 사라진다, 시장 자율적 규율에 맞는 제도 정비 필요
자사주의 마법도 더는 보기 힘들 전망이다.
최근까지 대기업은 인적분할 때 자사주 의결권이 부활하는 일명 '자사주의 마법'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새정부들어 경제 민주화에 논의로 더 이상 마법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지난해 7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업이 회사 분할 시 자사주 소각을 강제하거나, 자사주에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상법 369조에 의하면 회사가 가진 자기주식,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그런데 인적분할을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존 회사 주주들은 분할된 회사의 신주를 원래의 지분 비율만큼 똑같이 배정받는다. 의결권을 가진 자회사 지분인 분할신주는 통상 오너 일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경우가 많아 이들의 영향력도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 적은 지분으로 큰돈 들이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어 '자사주의 마법'이라고 불린다.
주주가치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데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삼성전자가 자사주 처분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는 지주회사 전환 포기와 함께 대규모 자사주 소각 방침을 밝혔다. 이미 보유하고 있던 보통주 1798만1686주(12.9%), 우선주 322만9693주(15.9%) 약 40조원어치와 올해 새로 매입할 자사주 9조3000억원어치를 모두 소각키로 한 것.
김우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등이 한국증권학회지에 발표한 '한국 기업의 자사주 처분 및 소각에 관한 실증 연구' 논문에 따르면 기업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취득한 자사주를 보유하기보다는 처분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지배구조(한국기업지배구조원 점수)가 좋거나 배당을 많이 하거나 이사회의 평가가 좋을수록 자사주 소각을 많이 했다.
조성익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1일 KDI 포커스(Focus) '자기주식 처분과 경영권 방어' 보고서에서 중·장기적 관점에서 자사주를 경제적 본질에 맞게 재무관리수단으로만 활용하도록 하되, 단기적으로도 회사의 가치를 훼손하는 과도한 경영권 방어를 제어할 정책수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독 당국의 자기주식 처분 심사를 도입해 일반·소액주주의 손실 가능성을 사전·사후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며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립적 사외이사의 역할이나 일반·소액주주의 손해배상 청구 등 시장을 통한 자율적 규율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 전반을 정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하지만 재계도 할 말은 있다.
자사주는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하는 '당근책'이었다. 지주회사법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재벌의 순환출자를 막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1999년 최초 도입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자사주 보유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사주는 주주가치를 높이는 적극적인 수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