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합병 안건을 단 한 차례 다루고 그나마 회의록마저 남기지 않은 위원회에 다시 안건을 맡길 수 있을까.'
지난 4월부터 진행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 전 장관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박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서 합병 찬반 여부를 판단했던 것이 적절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문 전 장관의 압력에 의해 부당하게 이뤄진 일인지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투자위 판단이 우선, 전문위는 보조적
국민연금은 기금운영본부 내 투자위원회와 외부인사로 구성된 주식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결권전문위)에서 의결권 행사를 결정한다. 의결권전문위는 지난 2005년 근로자단체와 사용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위원들로 구성하도록 신설한 곳이다. 특검은 전문위가 아닌 투자위에서 판단을 내리도록 국민연금에 압력이 행사됐고 이는 합병에 찬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지침 17조 5항에는 '의결권행사는 원칙적으로 국민연금이 행사하되 공단에서 찬성 또는 반대의 판단이 곤란한 경우에 의결권전문위에 요청한다'고 규정돼 있다. 투자위원회나 의결권전문위 어느 한 쪽이 상위 기관인 것은 아니며 기본적으로 투자위원회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하는 셈이다.
다만 두 위원회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위원회의 차이에 대해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투자위는 경제적 실익과 법리 위주로 판단하기에 전문성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전문위는 사회적·정치적 부분을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전문위는 사안의 형평보다 자신들을 추천한 사회 각계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다.
때문에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방향 대부분을 투자위에서 결정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이뤄진 약 2만5000여 건의 의결권 행사 가운데 대부분은 투자위에서 판단했다. 이 가운데 전문위에 부의된 안건은 14건에 그쳤으며 기업 합병 안건은 단 1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1건에 불과한 합병 안건마저 졸속으로 결정됐다는 비평을 받는다. 전문위가 판단을 내린 유일한 기업 합병 안건은 SK와 SK C&C의 합병 시도였다.
◆깜깜이 전문위… 신뢰도 낮아
전문위는 이 합병에 대해 반대 판단을 내렸지만 회의록이나 의사록을 남기지 않아 사후에도 판단 과정을 일체 알 수 없도록 했다. 현재 국정농단과 관련해 진행 중인 재판들에서 국민연금공단 투자위와 전문위 비교를 위해 회의록 등 전문위의 토의 과정을 확인하는 자료를 요청했지만 전문위가 일체의 자료를 남기지 않은 탓에 A4 1장 분량 결과문만 받을 수 있었다. 회의 모든 과정을 녹취하고 회의록을 남겨 사후에도 의사결정 과정을 확인하도록 한 투자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때문에 국민연금에서 전문위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결정할 때 책임을 회피하고자 사용하는 기구' 정도의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지난 12일 재판에서 박창균 전 전문위 위원은 "전문위는 논란이 되는 안건을 넘겨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지 않게 해주는 편리한 기관"이라고 증언했다. 최상목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여러 증인들도 투자위에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을 듣고는 '책임감을 갖고 판단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위는 의결권 행사 결정에서 우선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전문성과 공정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단 한 번 맡았던 합병안건인 SK와 SK C&C 합병안에도 반대 결정을 내리면서 의사록·회의록은 남기지 않아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입증했다. 때문에 법조계 일각에서는 삼성물산 합병 찬반 판단을 전문위가 내렸어야 했다는 특검 주장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적폐를 청산한다며 특검에 힘을 실어준 사회 분위기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특검 주장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기에 삼성이 특혜를 받았다 주장하면서 전문위가 판단을 내리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도 특혜라고 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