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 지원을 둘러싼 '동상이몽'이 삼성의 잘못일까.
삼성은 2015년 3월 승마협회 회장사가 됐다. 기존 승마협회 회장사였던 한화를 대신해 삼성이 회장사가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 때문이었다. 승마협회장 자리는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맡았다.
하지만 삼성은 눈에 띄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해 7월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 30분 가량 대화를 나눴는데 이 부회장의 특검 진술에 따르면 이 가운데 15분은 승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부회장은 '내가 부탁을 했음에도 삼성이 승마협회 맡아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마는 말이 중요하므로 좋은 말을 사야 하고 올림픽에 대비해 해외전지훈련도 가야 하는데…'라고 크게 질책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대통령 독대 직후 이 부회장은 박상진 전 사장을 불러 독대 내용을 설명하며 "더 이상 승마에 신경 쓰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삼성의 승마 지원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김종찬 전 승마협회 전무는 지난 20차 공판에서 "(박상진 전 사장이) 2015년 7월에야 갑자기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 방법을 알아보라 지시했다"며 "올림픽 출전을 대비한 자체 보고서를 전달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때 박 전 사장에게 전달된 것은 김 전 전무가 6월 별도 지시가 없었음에도 만든 중장기 승마 로드맵이다. 이 로드맵은 보다 앞서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가 메일로 보내온 것을 김 전 전무가 손질한 것이었다. 삼성이 승마협회 회장사가 되자 승마계가 먼저 움직인 셈이다.
이 로드맵에는 삼성의 지원을 받아 국내 유망한 승마 선수들을 독일에서 훈련을 시키고 2020년 도쿄 올림픽에 단체 출전을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도쿄 올림픽을 목표로 승마협회가 먼저 움직인 이유는 박원오 전 전무가 박재홍 전 한국마사회 승마감독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박재홍 전 감독은 선수들의 전지훈련을 책임질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승마협회의 요청으로 독일로 파견됐던 인물이다.
박재홍 전 감독은 지난 13차 공판에서 "박원오 전 전무가 삼성을 이용해 올림픽 단체 출전을 해보자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국내 승마계에서 올림픽 단체출전이 있었던 것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마지막이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선 좋은 마필을 비롯해 많은 지원이 필요한데 여기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승마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 한 명에 그랑프리급 마필과 훈련용 보조마, 마필 운송용 차량, 코칭스태프 등 지원인력과 숙소 등이 지원되어야 한다. 실제 정유라씨가 사용한 그랑프리급 말 비타나V의 가격만 해도 150만 유로(약 20억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988년 개최국 자동 출전권을 얻은 서울올림픽을 제외하면 한국 승마계가 올림픽 단체전에 진출했던 것은 장애물 단체전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두 번에 불과하고 종합마술과 마장마술 단체전은 출전한 사례가 아직 없다.
20차 공판에서 김종찬 전 전무 역시 같은 취지의 증언을 했다. 그는 "2015년 6월 커피숍에서 만난 박원오가 중장기 로드맵을 설명했다"며 "올림픽 승마에 단체로 출전한다는 것은 승마협회의 꿈이었고 삼성에서 지원한다고 해 다들 고무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승마계에서 삼성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이끌어내자는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승마계의 꿈을 이뤄달라는 명분에 대통령의 질책이 겹친 삼성은 대대적인 지원을 나서게 된다. 박재홍 전 감독은 "박 사장이 진심으로 도우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을 이용해' 단체전 출전비용을 마련하려던 승마협회의 뒤에는 최순실씨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삼성의 지원금 대부분을 최씨에게 빼앗기고 만다. 김종찬 전 전무는 "최순실씨는 정윤회씨의 부인이고 정유라씨도 정윤회씨의 딸로 알려졌다"며 정유라씨를 그저 유복한 집안의 승마 선수 정도로 인식했다고 증언했다.
최순실씨의 개입으로 삼성의 승마 지원은 점차 변질됐다. 박원오 전 전무는 "삼성에서 선수를 뽑으려고 했지만 누군가를 뽑으려 한다고 하면 최순실씨가 '그건 안 된다, 이렇게 뽑으면 안 된다, 누구는 안 된다'고 막았다"며 "최씨로 인해 계약과 달리 점차 변질됐다"고 말했다.
박재홍 전 감독도 "중간에 최순실이 개입됐고 (나중에는)삼성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