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삼성전자 기자실에서 조정훈CL이 시각장애인용 시각보조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 개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오세성 기자
"흔히들 시각장애인은 앞을 아예 못 본다고 생각하잖아요? 헌데 86%는 명암을 구분하고 대다수는 여가 시간에 TV를 본다 하더군요. 그동안 시각장애인에 대해 무지했구나 하는 반성에서 시작됐습니다."
가상현실 기기 '기어VR'를 활용해 저시력자를 위한 시각보조기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를 개발한 조정훈CL은 앱 개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오큘러스 스토어에서 릴루미노를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고 20일 밝혔다. 갤럭시S7 이후 출시된 스마트폰 가운데 기어VR와 호환되는 모델이 대상이다. 스마트폰을 기어VR에 장착하고 릴루미노 앱을 다운받아 사용하면 전맹을 제외한 시각장애인들은 기존에 잘 보이지 않던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지난 18일 삼성전자는 릴루미노 개발 브리핑을 열었다. 기어VR에 스마트폰을 장착하면 착용자는 스마트폰 후면 카메라로 찍는 영상을 대화면으로 볼 수 있다. 릴루미노는 이를 활용해 영상을 시각장애인이 인식하기 쉬운 형태로 변환해 보여준다. 사물의 윤곽선에 인식이 쉬운 색을 넣어 강조하거나 색 밝기와 대비를 조정하고 색을 반전시키는 등의 기술이 적용됐다.
백내장, 각막혼탁 등 질환이 있거나 굴절장애와 고도근시를 겪는 시각장애인도 사물을 보거나 글씨를 쉽게 읽을 수 있다. 특정 부위 시야가 안 보이는 '암점', 시야가 줄어드는 '터널시야'를 가진 시각장애인을 위한 이미지 재배치 기능도 제공된다.
릴루미노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조정훈CL은 "안경이나 돋보기 등을 사용했을 때 최대 시력이 0.1에 그치던 시각장애인들이 릴루미노를 쓰면 0.8~0.9로 개선된다"며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릴루미노를 테스트할 때 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왔었다. 학생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릴루미노를 착용하고는 어머니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시각보조기는 기존에도 있는 제품이지만 구매에 100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 사전에 해외 본사를 방문해 직접 착용해보고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지도 점검해야 했기 때문. 시각보조기 구매를 포기한 시각장애인의 55.2%는 막대한 비용을 포기 이유로 꼽기도 했다.
조정훈CL은 "저렴하고 많은 이들에게 효과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며 릴루미노의 높은 접근성을 강조했다. 릴루미노는 스마트폰과 기어VR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으며 증상에 따른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기에 시각장애인이 사용하기 편리하다.
기어vr을 착용하고 릴루미노를 체험하는 모습. 릴루미노는 최대 8배율 확대 기능을 제공한다. /오세성 기자
릴루미노 개발은 삼성전자가 창의적인 조직문화 확산을 위해 실시한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 C랩(Creative Lab)에서 이뤄졌다. C랩은 강한 조직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혁신성을 잃을까 우려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추진한 프로젝트다. 분야를 막론한 아이디어를 접수받고 혁신성이 인정되면 1년 동안 현업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다. 아이디어 제안자가 팀장이 돼 사내에서 팀원을 모으고 스타트업처럼 제품 개발에 나서는 구조다.
C랩에는 현재까지 180개 과제를 선정해 수행했거나 수행 중이다. 완료된 과제 중 63개가 관련 사업부로 이관돼 활용되고 있으며 스핀오프로 창업에 나선 과제도 25개다.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완료된 과제가 40개, 중간에 실패한 과제도 8개가 있다. 이 과정에서 참여한 직원은 750명에 이른다.
이재일 삼성전자 C랩 상무는 "C랩에는 실패율 90%에 도전한다는 말이 있다. 쉽게 달성할 수 있는 평범한 목표 대신 어렵고 독창적인 과제를 발굴하겠다는 의미"라며 "뇌에 초음파로 자극을 줘 오감을 느끼도록 하겠다는 과제가 있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창의적인 과제에 시도하는 것이 C랩"이라고 말했다.
C랩은 스핀오프를 하는 팀에게 최대 10억원을 투자한다. 때문에 우수 인력과 자본이 유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이재일 상무는 "이제까지 250억원이 투자됐는데 큰 비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독립한 회사들이 증시에 상장하거나 삼성전자에서 수천억원을 들여 다시 사들일 정도로 커지길 바란다"고 희망을 드러냈다. 이어 "회사가 망하는 경우에도 삼성전자에 경력사원으로 다시 채용하고 있다. 창조적 도전과 실패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1년 동안의 과제를 마친 릴루미노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1년 추가 과제 진행이 결정됐다. 기어VR 형태는 이목을 많이 끌기에 실외에서 사용하기 어렵다는 시각장애인들의 요청에 대한 삼성전자의 대답이다.
조정훈CL은 "안경형 제품을 개발해 세계 2억5000만명 이상의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에게 일상생활을 찾아주겠다"는 다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