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 대출금을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걱정이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부정적 관찰대상(watch list)으로 낙인 찍히면서 투자계획은 고사하고, 당장 운영자금 마져 빌릴 곳이 없다." 한 중견 기업 재무담당 임원 A씨의 하소연이다.
A건설사는 차환용 회사채 발행을 타진하다 낭패를 봤다. 최근 국내 한 중소형 증권사와 주관계약을 체결했다가 한 달이 넘도록 인수단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때문이다. 팔리지도 않을 물량을 떠안았다가 자칫 평가손실을 우려한 증권사들이 손사레를 쳤던 것. 회사채 발행을 미루자니 미국의 12월 금리 인상이 걱정이다. 국고채 금리 상승세가 큰 부담이여서다. 한국은행까지 기준 금리를 만지작하고 있다.
이 회사 L 임원은 "회사채 발행을 강행하려던 이 기업은 증권신고서 제출 직전 단계에 결국 포기했다. 상환전환우선주(RCPS) 발행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내년에 갚아야 할 회사채가 45조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운 조선 등 취약 업종 기업을 중심으로 '만기폭탄' 공포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 기관들의 푸대접으로 차환용 신규 발행이 여의치 않은 데다 발행에 성공한다 해도 이자율(발행금리)이 크게 올라갈 것으로 전망돼서다.
7일 투자금융(IB)업계에 따르면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무보증 회사채 규모는 45조1684억원 규모다. 이는 2017년 만기 추정액 43조원 보다 2조원 넘게 늘어난 규모다.
기업들이 갚아야 할 돈이 가장 많이 몰린 시기는 1분기다. 13조4154억원에 달한다. 이어 2분기 11조2544억원, 3분기 11조2147억원, 4분기 9조2833억원 규모다.
취약 업종의 만기 규모도 만만치 않다. 건설업에서는 1조4810억원, 조선 1조5950억원, 해운 970억원, 철강 1조730억원, 항공 9600억원, 에너지·화학 4조4000억원 규모다. 올해 보다는 만기 도래액이 줄지만 해당 기업들은 말그대로 자금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정부가 12월 금리 인상을 기정 사실화하면서 기업 자금조달 비용이 추가로 상승할 전망이다. 미 국채금리가 상승하면 회사채 발행금리 기준이 되는 한국 국고채 금리도 동반 상승이 불가피하다.
더욱이 금리상승기에 국고채 공급물량까지 늘어 금리상승을 더 압박하게 됐다.
동부증권의'2018년 적자국채 발행액 추정'을 보면, 정부는 국정운영 100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당장 내년에 62조원의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 총 128조2000억원의 국채를 발행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올해 발행 목표치인 103조7000억원보다 24% 가량 증가하는 것이다.
발행금리가 높아지면 기업 이자비용 부담은 커진다. 그만큼 한계기업은 자금조달이 힘들어지고 건전한 기업활동도 위축돼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다. 미국은 국채 대신 회사채 투자로 이동하고 있지만 한국은 갈 길이 멀다.
◆ 저금리 시대 끝…멀쩡한 기업도 돈 걱정
"돈 구할 곳 없는 기업들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일부 우량 대기업들을 제외한 중소·중견 기업은 회사채를 제때 갚지 못해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진 상태다. 상황이 이런데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겠는가."
기업 자금조달 업무를 지원하는 투자은행(IB) 관계자는 "회사채 시장이 한 겨울은 지났다. 하지만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어 기업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더 낮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3년 만기 회사채 금리(AA-)는 지난달 26일 2.665%로 연중 고점을 찍었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 처럼 시장 공모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은행 대출 처럼 채권자와 협상해 만기를 연장하거나 원리금 일부 탕감 등 채무를 재조정하기 어렵다. 약속한 만기일에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막기 위해선 금융권 등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수 조 원대 부실이 은행 등 채권단으로 전가될 수 있다.
현대차 LG 롯데 등 상당수 대기업의 경우 곳간이 든든해 걱정이 덜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인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금융주·우선주 제외)의 연결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127조7800억원으로 집계됐다. 금리가 오르기 전에 자금조달도 마쳤다.
문제는 중소기업들이다.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이곳엔 증권사 직원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중견 제조업체 자금담당 A전무는 "지금껏 돌아온 빚은 근근히 막았지만 앞으로 돌아올 만기를 어떻게 넘길 지 걱정이다"며 한숨을 내쉰다.
실적부진에 신용 강등 우려까지 커진 기업들의 고민은 더 크다. '신용등급 하락→자금조달 금리 상승→투자 어려움→실적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투자자 인식과 등급 간 괴리를 줄여 등급의 현실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면서도 "차환발행이 여의치 않은 기업은 자산유동화 등 대체조달 수단을 모색해야 하는데 비우량 등급의 경우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최악의 경우 좀비기업으로 낙인 찍혀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