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 대전 기술연구원 연구원들이 배터리 성능과 품질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LG화학
배터리 업계에는 '일본이 만들어 한국이 키우고 중국이 누린다'는 말이 있다. 최초 기술을 일본이 만들었고 상용화와 시장 성장은 한국이 이끌었지만, 기술 격차가 사라지면 낮은 가격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겼다.
이러한 경고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기술 격차 해소를 위해 한국의 고급 인재 빼가기에 나선 것.
26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 배터리 기업들은 한국 배터리 기업 연구개발(R&D) 직원들에게 소재, 셀, 모듈, 팩,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 직무를 가리지 않고 '현재 연봉의 3~4배'를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급을 기준으로 세전 약 1억5000만~2억원 가량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국내 배터리 3사에 다니다 최근 이직을 결심했다는 한 직원은 "근무는 중국에서 하게 되지만 업무 자체는 이전과 동일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며 "가전제품과 가구가 구비된 주택, 통신료·식대 등 생활비, 개인 통역사 제공, 한·중 항공권 지원 등의 혜택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3~5년만 근무하면 한국에서 있을 때 기대되는 소득을 모두 벌어들일 것"이라며 "법정휴가를 제외하고도 연간 22일의 유급휴가가 보장된다는 조건도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경력 10년이 넘은 고급 인력의 경우 5억원대 연봉을 제시받고 있다. 중국 업계의 인력 확보가 젊은 실무 인재들에 집중된 탓에 모집하는 수가 많지 않지만 국내 인력들의 관심은 높다는 전언이다. 국내에서는 명예퇴직이 현실로 다가온 차·부장급 인력인 만큼 중국에서 단기간 높은 소득을 올리는 편이 퇴직 후 인생 설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인력유출이 이뤄질 경우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도태가 이뤄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계의 무기는 기술력이었다. 일본에서 개발했지만 안전성 문제로 상용화에는 실패했던 리튬이온배터리 기술을 도입했고 기술력으로 안전성 문제를 극복하며 세계시장 주도권을 차지했다. 연구개발비용 탓에 큰 수익을 내지는 못했지만 전기자동차 상용화를 촉진할 수 있었다.
최근 전기차 시장이 본격화되며 대용량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고속 성장을 시작해 국내 배터리 업계의 수주 잔고도 급격히 늘어난 상황이다. 다만 기술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 업계의 약진과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삼은 중국의 배터리 궐기를 극복해야 현 우위를 지속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국내 업계에게는 기술 경쟁력이 중요하지만, 정작 기술 경쟁력을 높여주는 인재들에 대한 대우는 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터리 부문 직원들은 석유화학 부문 직원보다 연봉이 30~40%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화학 부문은 대규모 실적이 발생함에 따라 성과급이 지급되지만 배터리는 시장이 조성되고 성장하기 시작한 상태라 적자에서 갓 벗어난 수준이다. 때문에 보너스 등 성과급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개술 개발로 회사에 세계 최정상급 기술을 안겨준 인재들에 대한 박한 대우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학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도대체 엔지니어나 연구개발 인력을 어떻게 대우하기에 고급 인력들이 급여 하나만 보고 한국보다 열악한 환경의 나라로 쉽게 넘어가느냐"며 업계의 전문인력 홀대 현상을 성토했다. KTB투자증권 이충재 연구위원도 "'배터리업계의 인력 빼가기'가 아니라 '배터리 부문 인재 처우 정상화'가 문제"라며 "기술 격차의 근본은 사람이다. 성과급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
소형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일본 기업들은 핵심인력이 중국 배터리 기업으로 스카우트되며 기술 동력을 잃었고 파나소닉, AESC 정도를 제외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인력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만들어낸 역군"이라며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인력 유출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국내 업계가 고급 인력을 만들어 해외로 수출하는 '배터리 사관학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