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오랜 상담자 중의 한 분은 젊었을 적 미인 소리를 듣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미 삼십대 중반부터 보톡스며 휠러며 여러 종류의 성형시술을 해왔다. 칠십이 가까워진 지금도 얼굴만은 팽팽하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부분이 목이다. 목주름은 얼굴과 너무나 판이하다. 그것도 스카프며 목도리로 대충 감출 수는 있다. 그러나 손은 감출 수가 없다. 아무리 값비싼 반지를 끼고 네일칼라를 발랐어도 손등의 주름과 툭 튀어나온 혈관은 그녀의 나이를 말해준다. 자신의 노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행위다. 어떤 이는 화장을 하지 않으면 절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이도 보았다. 맨 얼굴로는 집 대문 밖 슈퍼에도 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단정히 꾸미지 않은 상태에서 바깥출입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이런 태도를 비난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피하며 성형이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자신의 맨 얼굴 조차 불편함을 느끼는 심리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러한 심리는 도대체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심리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나도 좋아할 수 없는 나의 주름을 타인도 싫어하고 흉하게 볼 거란 생각에 기인할 것이라 생각해보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존감이 반드시 팽팽한 얼굴이어야 하는 것일까? 주름을 감추고 색조화장을 하는 것에는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주름까지 사랑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 존재의 실상을 인정하는 지혜를 가진 자들만이 번뇌가 적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어려운 말이지만 번뇌가 적어지면 그 자체가 온전한 삶이 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더욱 복 밭의 종자도 키워나가 다음 세상 역시 안강할 수 있으리라. 불교의 세계관인 윤회의 메카니즘을 인정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외모나 남과의 비교는 더욱 불행의 씨앗이 깊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자본주의 상업상회의 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어서 상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많은 기업이나 미디어 매체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현들이나 많은 생각 있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때인가 부터는 외모지상주의가 현대사회의 대표적 특질이 되어버렸다. 내면의 자기 사랑은 남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때 완성된다. 자기 긍정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친 남과의 비교, 그리고 비교로부터의 자기 비하는 분명 그릇된 일이다./김상회역학연구원